63. 부유하는 좌표

by 조하나


바의 육중한 나무 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밤의 열기가 습격하듯 그녀를 덮쳤다. 에어컨 바람에 차갑게 식어 있던 모공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끈적하고 뜨거운 아열대의 대기를 빨아들였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틀거리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골목을 걸었다. 등 뒤에서 벤의 당황한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뒤통수에 꽂히는 것 같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순진무구한 파란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걱정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이 거대한 울렁거림이 한낱 옹졸한 질투심으로 전락해 버릴 것 같았다.


“우욱….”


골목 어귀, 가로등도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전봇대를 짚고 허리를 꺾었다. 위장이 뒤틀렸다. 뱃속에는 소화되지 못한 맥주와 땅콩 껍질, 그리고 그보다 더 딱딱하고 소화할 수 없는 이질적인 덩어리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벤이 내뱉은 그 해맑은 문장들. “여권도 필요 없어. 우리 땅이잖아.” 그 말속에 담긴 악의 없는 폭력성이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게워 내지 못했다. 입안에는 그저 씁쓸하고 비릿한 신물만이 감돌았다. 과식이나 과음 탓이 아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은 걸까.’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명치를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통증이 선명했다. 벤은 잘못이 없다. 그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세상을 의심 없이, 죄책감 없이 누리는 운 좋은 여행자일 뿐이다. 누군가는 그의 말을 듣고 “와, 부럽다. 나도 가 보고 싶다”라며 웃어넘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DNA 깊은 곳에는 식민지의 기억, 전쟁, 가난, 그리고 끊임없이 강자의 눈치를 보며 생존해야 했던 약소국 후손의 비틀린 자격지심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권력의 기울기를 기어이 감지해 내고야 마는 이 지긋지긋한 예민함. 스스로를 갉아먹는 이 피곤한 레이더를 그녀는 어떻게든 도려내고 싶었다.


그냥 벤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단순하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 버린 노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으나, 동시에 그녀가 짊어져야 할 형벌 같기도 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섰다. 인적이 끊긴 도로변에 혼자 불을 밝히고 덩그러니 서 있는 자동판매기가 보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윙-’ 하고 낮은 기계음을 내며 서 있는 그 네모난 철제 박스는 마치 심해에 불시착한 구조선처럼 창백하고 인공적인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넣었다. 짤랑. 경쾌한 금속성 소음이 밤의 적막을 날카롭게 찢었다. 그녀는 가장 차가워 보이는 우롱차 버튼을 눌렀다. 덜컹. 캔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이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도쿄든, 오사카든, 여기 변방의 섬 이시가키든, 돈만 넣으면 똑같은 규격, 똑같은 온도, 똑같은 맛을 제공하는 이 무감각한 기계. 감정도, 역사도, 국적도 없이 오로지 기능만으로 존재하는 이 사물이 지금은 벤의 다정한 위로보다 훨씬 더 편안했다. 차갑고 공평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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