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기술 전체주의', 민주주의의 종료 버튼을 누르다
최근 파리와 옥스퍼드 등지의 지적 살롱과 비공개 강연장에서는 실리콘밸리의 가장 논쟁적인 사상가이자 억만장자인 피터 틸(Peter Thiel)의 입에서 기묘한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바로 기독교 종말론에 나오는 ‘적그리스도(Antichrist)’다. 기술과 미래, AI를 논해야 할 최첨단의 자본가가 중세 신학 논쟁에서나 나올법한 용어를 들고 나온 이 상황을 대중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순히 괴짜 억만장자의 종교적 심취나 기행으로 치부하고 넘겨도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종교적 회심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선전포고’다. 그가 소환한 적그리스도는 뿔 달린 악마가 아니다. 피터 틸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기후 위기, 핵전쟁, AI 폭주와 같은 실존적 공포가 역설적으로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통제 기구, 즉 ‘글로벌 거버넌스’를 탄생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바로 이 ‘단일 세계 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환경 규제, AI 안전장치, 다자간 협력 기구(UN, EU 등), 심지어 기후 환경 위기 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를 싸잡아 ‘적그리스도’라고 명명했다.
이 은유가 섬뜩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가 ‘적그리스도(국가의 통제)’를 막기 위해 제시하는 대안이 바로 ‘기술 기업에 의한 무한한 자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현재,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미국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다. 그것은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기술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낡은 운영체제를 포맷하고, 그들만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거대한 실험의 시작이다.
이들의 폭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뇌 구조를 지배하는 사상적 뿌리를 파헤쳐야 한다. 실리콘밸리 우파의 이념적 대부로 불리는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필명 멘시우스 몰드버그)이 주창한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NRx)’가 그것이다.
민주주의는 인류 최선의 발명품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NRx는 “민주주의는 실패한 실험”이라고 단언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선동에 취약하며, 무엇보다 ‘유능한 엘리트(CEO)’가 세상을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버그 투성이 시스템이다. 야빈은 이를 대체할 모델로 ‘국가 주식회사(Gov-Corp)’를 제안한다. 애플이나 구글이 직원 투표로 CEO를 뽑지 않고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듯 국가 역시 주주(소유권자)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강력한 1인 독재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관에서 언론, 학계, 시민단체는 존중받아야 할 감시자가 아니라, 대중을 세뇌하여 엘리트의 통치를 방해하는 거대한 ‘대성당’이자 적으로 규정된다. 일론 머스크가 ‘X(구 트위터)’를 인수한 뒤 기존 언론을 ‘레거시 미디어’라고 조롱하며 알고리즘을 조작해 혐오 발언을 방치한 것, 그리고 트럼프가 전문가 집단을 끊임없이 불신하는 것은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이 ‘대성당’을 무너뜨리기 위한 NRx의 제1원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이다.
피터 틸이 2009년 “나는 더 이상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썼던 에세이는 이들의 선언문이었다. 그들은 대중의 동의를 구하는 민주적 절차를 거추장스러운 비용으로 여기며, 기술적 특이점에 도달한 소수의 천재들이 인류를 강제로라도 구원해야 한다는 위험한 메시아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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