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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30. 2024

‘방 안의 코끼리’가 사람을 밟아 죽이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이 코끼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Elephant in the room.’     


‘방 안의 코끼리’라는 이 표현은 명백히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적어도 일부를 불편하게 하거나 개인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선동적이거나 위험하기 때문에 아무도 언급하거나 논의하고 싶지 않은 중요하고도 거대한 주제, 질문 또는 논쟁적인 문제를 은유하는 영어의 관용적인 표현이다.       


작가 이반 크릴로프의 <호기심 많은 남자>(1814)는 박물관에 가서 온갖 작은 것들을 발견하지만 정작 거대한 코끼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우화이다. 이후 ‘방 안의 코끼리’라는 문구는 우리가 절대 이야기하지 않고 못 본 척, 없는 척하는 거대한 문제를 의미하는 속담이 되었다.      








Tai, Banksy's elephant in the room. ⓒ Damian Dovarganes / AP




얼굴 없는 아티스트 뱅크시가 2006년, 그의 첫 미국 전시회 <Barely Legal>가 말 그대로 커다란 코끼리가 거실을 가득 채운 작품을 선보였다. 벽지의 패턴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페인트를 코끼리에 입혀 거실에 둔 것이다. 뱅크시는 캘리포니아 당국으로부터 코끼리를 전시에 포함하기 위한 적절한 허가를 받은 상태였지만, 코끼리에 (아무리 무독성 염료라 해도) 페인트칠을 한 건 학대라며 수많은 동물보호단체가 반발했다. 결국 전시 마지막 날 코끼리는 페인트칠 없이 거실을 어슬렁 거렸다. 코끼리를 배경에 섞기로 한 뱅크시의 작품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빈곤과 기아 같은 문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명 존재하지만, 너무나 거대하고 선명해 보이지 않는다고 차마 말할 수 없는, 하지만 우리가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방 안의 코끼리’.


윤석열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한국 사회는 그를 ‘도자기 박물관 안의 코끼리’로 취급해 왔다. 한국의 진보 학자이자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가장 먼저 이 표현을 윤석열에 적용했다. 하지만 이는 코끼리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그리고 코끼리 중심적인 시각이었다. 윤석열을 두둔하는 입장에선 “에이, 평생 강직한 검사로만 살아와서 정치를 잘 몰라 그러는 거야” “잘 모르지만 학습 능력이 높으니 빨리 배워서 잘할 거야”라는 말로 방어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한 나라의 서열 1위 대통령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쩔쩔매는 금쪽이처럼 여겼다. 서로 못 할 짓이었다.      


그 사이 방 안의 코끼리는 연약하고 섬세한 온갖 도자기들이 깨부수기 시작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 쾅, 놀라 뒷걸음질 치며 쾅, 기분 좋다고 코를 휘저으며 쾅, 커다란 제 몸을 누일 곳을 만든다며 쾅. 그렇게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길 위에서, 터널 안에서, 시위를 하다가, 일 하다가, 군대에서 나라를 지키다가 죽어 나갈 때 가장 역겨운 코끼리 조련사들의 변명은 “코끼리에겐 악의가 없었다”라는 말이었다.   




   





대통령의 언어의 무게는 코끼리만큼이나 무거워야 한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 언어가 국가의 정책을 좌우하고, 대외적으로 한국을 표상하는 철학과 이미지를 나타내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십 대의 불안함과 흔들림을 홍대와 이태원 길거리에 쏟아부었다. 그 길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제도화된 시스템 밖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독립 예술가들, 사회와 법률이 정한 방법 말고도 다채로운 사랑의 길이 있다는 걸 평화롭게 보여주는 소수자들, 그리고 행동가들. 다양성이 존중되고 때때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충돌과 갈등마저도 자유롭고 아름답게 표현되는 곳, 그리고 그 길을 닮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서 나는 꿈을 찾아 기자가 되어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며 삼십 대를 보냈다.


우리가 점점 나이 들어 그 길을 떠나도 또 다른 젊고 반항적이며 자유를 논하는 이들이 그 길의 정신을 이어 채워갈 것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바로 ‘문화’ ‘정신’ ‘영혼’이라고 부른다.      





길 위의 생채기들이 여전히 신음하고 있을 때 윤석열은 그 길에 대통령의 권한으로 불쑥 나타나 “뇌진탕” 소리를 늘어놓고는 영정사진도 위패도 없는 추모식부터 공무원들의 근조 리본까지 곳곳에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했다. 참사는 막을 수 없었대도 윤석열은 그 참사를 이용해 이태원의 영혼마저 앗아갔다.      


아버지의 강압으로 사법시험 통과를 위해 9수나 했다는 ‘금쪽이’ 검사가 일평생 친구들과 이태원에 가서 핼러윈 축제를 경험해 봤을 리 만무하겠지만, 그런 직접 경험의 한계를 보완하고 시야를 넓혀 다른 사회구성원들과의 공감대를 두텁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오랜 특수부 검사 생활로 윤석열이 마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마음만 먹으면 괴롭힐 수 있는 피의자들이었고, 그에게 피의자는 곧 잠재적 범죄자를 뜻했다.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피의자와 부하들과의 경험이 인생의 전부인 삶에서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권력자가 된 건 너무 당연했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이후 대통령실에서 구매한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과 극우 유튜버의 음모론실제 국정에 반영되고 있다폭로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윤석열의 경험은 가난하고, 언어는 남루하며, 세계는 좁다. 그의 세계는 폭력적이고 어두우며, 그의 어둠은 또 다른 어둠을 끌어들인다. 가난한 경험은 공감 능력 또한 가난케 만든다. 당연히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나 세력을 모으는 정치는 불가능하다. 결국 그는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만 센, 콤플렉스와 자격지심에 가득하고 두려움에 떨지만 그걸 숨기기 위해 더 허세를 부리는 거대하고 아둔한 코끼리가 되었다.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이미 우리는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의 무능은 범죄라는 걸 세월호 참사로 인한 304명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배웠다. 방영 예정되었던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는 윤석열이 자리에 앉힌 KBS 경영진의 압박으로 결국 전파를 타지 못했다. 윤석열은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국민적 스타가 된 박근혜 특검을 통해 이미 자신의 말로가 어찌 될지 알기 때문이다.


‘악의가 없다’는 말은 ‘선의를 가졌다’와 엄연히 구분되는 말이다. ‘악의가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악의가 없이’ 한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나름의 신념과 명분이 있었다. 앞으로 ‘악의 없는 방 안의 코끼리’는 두려움과 피해의식으로 더 크게 날뛰며 방 안의 모든 것을 깡그리 망가뜨릴 것이다.      


“탄핵을 남발한다”며 국민을 ‘탄핵중독자’라 칭한 정치평론가나 여권 인사들은 나라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눈치나 보고 권력에 붙어 단물만 빨아먹는 그 짓거리, 모두 역사에 남을 테니 제발 시간이 천천히 가기만을 기도하라. ‘국정 공백의 부담’이나 ‘대한민국의 이미지 추락’ 같은 기만적이고 빈약한 명분으로 더 이상 ‘방 안의 코끼리’를 두둔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지금, 이미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탄핵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 행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다. 내 자식이 ‘금쪽이’라면 어떻게든 훈육하며 책임을 떠안고 인내해야겠지만, 대통령이 ‘금쪽이’라면 버려야 한다. 대통령은 이 나라의 왕도 아니고 신성불가침도 아니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내 한 몸 희생해 책임져야 하는 나의 가족도 아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인내하고 존중했다. 제 스스로 나갈 길조차 찾아 나가지 못하는, 아니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큰 희생이 따르는 코끼리를 이제 방에서 내쫓을 때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나의 몫을 다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 윤석열 대통령 탄핵 국민동의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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