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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방인과 나비효과

by 조하나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할 무렵, 섬의 새벽은 어김없이 수탉들의 요란한 합창으로 시작되었다. 각각 다른 시간과 다른 음색으로 터져 나오는 그 소리들은 어둠 속에서도 살아남은 생명들의 끈질긴 증언 같았다. 습한 공기가 발코니 열린 창틈으로 스며 들어와 뭉근한 땀에 얼룩진 그녀의 피부에 차갑게 감겨들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감겨 있었다. 몸은 침대에 누워 있었으나 마치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무겁고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은 반복되지만, 그녀의 여권에 체류 기간 ‘7일’이 찍힌 이후의 아침은 더 이상 같지 않다. 그녀가 언제든 이 나라에서 쫓겨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냉정한 현실을 상기시키며 가슴을 짓눌렀다. 이 섬에서 자리를 잡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꿈을 꾸기 시작했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장의 종이와 하나의 도장으로 순식간에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절대적인 무력감이 그녀를 감쌌다. 시스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자신, 정당한 권리조차 돈과 편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씁쓸한 현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이고 싶은가’ 자문하며 스스로에게 보냈던 조소까지. 그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밤새 그녀를 괴롭혔다.

창밖의 푸른 기운은 점점 짙어지고, 하늘의 색은 파랑에서 연보라, 그리고 다시 옅은 분홍빛으로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게으른 섬의 태양은 아직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전이었지만, 빛은 이미 섬 곳곳에 스며들어 야자수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고, 해변의 고운 모래알을 깨우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려왔고, 저 멀리 바다에서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속삭였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녀의 시간은 ‘7일’이라는 덫에 걸려 멈춰 선 채였다. 언제든 추방될 수 있다는 칼날 같은 현실 앞에서, 섬의 아름다움조차 멀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곧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허망함이 평화로운 새벽 풍경 위로 드리워졌다. 불안은 이토록 영혼을 잠식한다.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그녀는 숨을 쉬었다. 천천히, 깊게. 클로드의 “그냥 숨 쉬어(Just breathe)”라는 말이 떠올랐다. 바닷속에서는 오직 숨 쉬는 것만이 중요했다. 복잡한 생각도, 불안도, 후회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이곳, 뭍에서는 숨 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숨 쉬는 것 외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7일 안에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강사 과정을 시작하고, 이 섬에 머물 합법적인 자격을 얻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녀라는 개인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관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언제든 ‘너는 자격이 없다’ 말하며 그녀를 내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시스템이 싫어 도망쳐 온 곳에서 또 다른 시스템이 그녀를 골탕 먹였다. 그녀는 한없는 무기력감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맨발에 닿는 타일의 차가운 감촉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녀는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거울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 섬에 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 사회의 기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검열. 그 모든 거울 앞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간단한 짐을 꾸렸다. 부피가 큰 다이빙 장비가 든 캐리어 대신, 하루 입을 옷가지와 여권, 지갑, 그리고 휴대폰이 전부인 작은 배낭 하나였다. 짐을 꾸리는 그녀의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다. 짐의 무게는 곧 삶의 무게 같았다. 도시에서의 삶이 30킬로그램이 넘는 캐리어에 담겨 있었다면, 섬에서의 삶은 이 작은 배낭 하나로 충분했다.

숙소 문을 나서자, 아직 인적이 드문 새벽의 섬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달달거리는 스쿠터 소리가 조용히 해변 도로를 갈랐다. 이 섬에서 배를 타고 이웃 섬으로 갔다가 또다시 배를 타고 메인랜드로 향한 뒤 밴을 타고 한참을 달려 육로로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녀는 먼저 이웃섬 코사무이의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비자 런 에이전시의 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기 전, 서둘러 길을 나서려는 듯 밴은 시동을 켠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밴 앞에 선 남자가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 위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비쳤다.

“하! 나! 초?”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고쳐 맸다. 남자는 손짓으로 밴에 오를 것을 안내했다. 밴 안에는 이미 일곱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제각각 다른 피부색, 다른 머리색,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들은 모두 이 섬에 머물기 위해, 혹은 섬을 떠나지 않기 위해 이 새벽, 밴에 오른 ;시스템 속 이방인;들이었다. 젊은 여행객들부터 중년의 부부, 혼자 온 듯한 남자까지,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옅은 긴장감이나 체념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향해 비어있는 좌석을 가리키며 앉으라는 제스처를 표했다. 그녀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밴의 가장 뒤편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섬의 윤곽이 보였다. 밴의 문이 닫히고, 익숙한 달달거림 대신 자동차 엔진 특유의 거친 진동과 소음이 시작되었다. 섬의 고요와 단절된,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소음의 세계. 비자 런이라는, 어딘가 찜찜하고 씁쓸한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자 런 트립을 이끄는 남자는 스위스 출신이라고 했다.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그는 긴 장발 머리를 말총머리처럼 단단하게 묶고 있었다. 더운 태국의 새벽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이크 스타일의 낡은 가죽점퍼와 진을 입고 부츠까지 신은 그의 모습은 밴에 탄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밴에 탄 몇몇 승객들이 그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며 ‘히틀러’라고 불렀다. 처음 듣는 기묘한 별명에 그녀의 눈은 휘둥그레졌으나 곧 그들이 이미 그와 함께 비자 런 트립을 여러 번 다녀온 단골들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히틀러’에게 간단한 서류를 내밀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는 서류를 훑어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무비자 90일 체류가 가능한 대한민국 여권인데, 왜 이 트립을 신청한 거야?” 그녀는 이민국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7일짜리 스탬프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녀의 여권과 서류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자 런 트립 비용 4천 밧을 요구했고, 그녀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걱정 마. 말레이시아에 있는 태국 대사관에서 적법한 체류 비자를 받는 거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야.” 그는 덧붙였다. “대한민국 여권은 원래 무비자 90일 체류가 가능하니 따로 관광비자 비용을 지불할 필요는 없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필요 없는 비용을 지불하고, 어딘가 꺼림칙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히틀러’라고 불리는 이 기묘한 남자가 시키는 대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너 시간 동안 밴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야자수와 이름 모를 열대 식물들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목적지는 아직 멀었다. 허허벌판에 있는 작은 태국식 식당에 밴이 멈춰 섰다. ‘히틀러’는 밴에서 내리자마자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목소리로 승객들에게 소리쳤다. “20분 후 출발! 1분이라도 늦으면 두고 갑니다!”

승객들은 밴에서 내려 일제히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서는 차가운 빵에 얇은 패티, 상추 몇 장, 토마토 슬라이스 하나가 들어간 부실한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다. 사람들은 허기를 채우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 뒤, 식당 밖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삼삼오오 모여 작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었다. 아무도 ‘히틀러’가 외친 20분이라는 시간을 정확히 맞추려 애쓰는 것 같지 않았다. 시계나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마쳐야 한다는 강박처럼, 그녀는 서둘러 부실한 햄버거를 입에 욱여넣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는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정확히 20분을 맞춰 밴 안으로 돌아왔다. 텅 빈 밴 안에 혼자 앉아, 그녀는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요란하게 느껴지는 고요 속에서 출발을 기다렸다. 그녀의 ‘열심히 하는 병’은 이런 낯선 곳에서도 어김없이 발현되고 있었다.

잠시 후, ‘히틀러’가 밴 문을 벌컥 열고 올라탔다. 당연히 밴 안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는 신경질적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말을 멈추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미스 코리아! 시간에 맞춰 와 있었네. 제시간에 밴으로 돌아온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함께 미묘한 감탄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저 당연한 일이었다. 약속된 시간 안에 약속된 장소에 가는 것. 규칙을 지키는 것.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나 이 작은 순간이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임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문득 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히틀러’라고 부르는구나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소리를 지르는, 그 과장된 권위적인 모습. 이 섬을 찾은 자유로운 영혼들은 그의 통제에 ‘히틀러’라는 별명으로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또다시 밴은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렸다. 섬을 벗어나 육지로 향하는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로 기울며 주홍빛과 보랏빛 물감을 풀어놓았다. 밴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긴 로드 트립에 익숙한 듯 제각각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조용히 책을 읽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 세계에 침잠했으며, 또 누군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했다. 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늘어선 야자수 나무들, 멀어지는 섬의 잔상, 그리고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 이 모든 것을 보며 자신이 ‘시스템 속 이방인’으로서 낯선 육지를 유영하고 있는 이 상황을 그녀만의 문체로 묘사해 보려 애썼다. 문장들은 쉽사리 완성되지 않았고, 단어들은 공기 중에 흩어지는 물거품처럼 잡히지 않았다. 현실은 글보다 훨씬 거칠고 예측 불가능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밴은 작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비자 런 트립을 위해 하룻밤을 묵어갈 곳이었다. ‘히틀러’가 다시 한번 목청을 돋우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사람들의 여권을 모두 걷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자신이 먼저 말레이시아 주재 태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 업무를 볼 테니, 사람들은 아침 식사 후 밴을 타고 대사관으로 와서 얼굴을 확인하고 체류 기간 스탬프가 찍힌 여권을 수령해 가면 된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곳은 크고 작은 폭탄 테러가 일어났던 곳입니다. 늦은 밤 호텔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마세요.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호텔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제공되는 호텔 앞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원래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그녀는 식욕이 없었지만, 이미 자신이 지불한 비자 런 트립 비용에 식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 떠올라 의무감처럼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 테이블에 비자 런 트립에 함께 온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하고 모두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었다. 그녀 혼자 아시안이었다. 자연스레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부실한 아침 식사를 깨작거렸다.

식사를 하던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금발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관찰했던 듯했다. “음… 혹시 영어 할 줄 아니?” 조심스럽게 던지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당연히 그녀가 영어를 못 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편견이 만든 거리감이 느껴졌다.

“물론이지.” 그녀는 능숙한 영어로 대답했다. “물론 내 모국어인 한국어만큼은 아니지만, 네가 영어로 하는 말, 알아들을 수 있어.” 그녀의 유창한 대답에 그는 조금 놀란 듯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오, 정말? 몰랐네. 어디서 왔어? 중국? 일본?” 이 또한 익숙한 질문이었다. 아시안에게 던지는 아시아에 대해 잘 모르는 서양인들의 흔한 물음. 그들의 선택지에는 늘 ‘한국’은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한국(Korea).” 그리고 그의 다음 질문이 무엇일지 알기에, 그녀는 지체 없이 덧붙였다. “남쪽(South).” 그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운이 역력했고, 그녀는 속으로 미묘한 통쾌함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밴에 다시 올라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 앞에는 먼저 도착한 다른 비자 런 승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히틀러’는 밴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담당 직원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자기 이름을 말하세요. 여권을 찾으러 왔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미소를 짓고 이름을 말하면 돼요.” 그의 지시는 기묘했지만, 사람들은 별다른 의문 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줄을 서서 한 명씩 작은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대사관 비자 업무 담당 직원에게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 직원은 무표정했지만, 사람들은 ‘히틀러’의 지시대로 모두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차례가 되어 유리창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사무실 안쪽에 서 있는 ‘히틀러’를 발견했다. 대사관 직원의 사무 공간, 곧 시스템의 심장부 안에 그가 서 있었다. 이래서 그가 비자나 체류 기간을 받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그토록 호언장담했구나. 어둠의 커넥션은 상상보다 훨씬 깊고 구체적이었다. 그녀는 ‘히틀러’가 말한 대로 담당 직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직원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에게 나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억울한 사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작은 의자들이 놓인 대사관 밖 대기 공간에서 사람들은 여권을 기다렸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그들은 여권에 찍혀 나올 비자 스탬프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틀러’가 여권을 손에 들고 대사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여권을 나눠주었다. 여권을 받아 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만족감이 번졌다. 다들 무사히 원하는 기간만큼의 체류 비자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히틀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스 코리아!” 그는 그녀에게 여권을 건네며 말했다. “얼마 전 말이야, 태국 고위층 로열패밀리의 딸이 한국에 놀러 갔다가 입국 심사에서 입국 불허를 받았대. 한국 이민국 직원이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돌려보냈다나 봐.” 그의 목소리에는 태국 고위층 인사에게 벌어진 ‘모욕적인 사건’의 여파가 미치는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체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그 이후로 한국 사람들이 태국에 입국할 때 무비자 90일 체류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하네. 네가 받은 7일짜리 스탬프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야.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지.”

그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몸에 힘이 풀리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 그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이가 느낀 굴욕감이 나비효과처럼 그녀의 삶,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삶에 이런 직접적이고 부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한 사람의 자존심이 어떻게 다른 수많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현실을 뒤흔들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여권을 손에 쥔 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히틀러’를 올려다보았다.

여권에 찍힌 도장을 확인했다. 선명한 90일.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마터면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히틀러’의 말처럼, 그녀는 단지 운이 좋지 않은 것뿐이었을까. 그 불합리한 이유가 주는 허탈함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몰랐던, 혹은 외면하고 싶었던 세계의 일부분을 경험했다고 느꼈다. 돈과 비합리적인 커넥션으로 움직이는 시스템, 누군가의 자존심이 다른 누군가의 현실을 송두리째 흔드는 곳. 불합리하든 아니든, 가치 판단을 떠나 그저 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자신의 상황을 떠올렸다.

서울에서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영원히 이 세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시스템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며, 언제든 자신이 사회에서 약자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무감각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발 딛고 선 작은 땅과 그녀의 삶과 경험으로 얻은 것들만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세계 속에 갇혀, 다른 세계의 아픔과 부조리함에 눈 감은 채로. 하지만 지금 그녀의 세계는 원하든 원치 않든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시스템 속 이방인으로서의 처지는 그녀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시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든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게 했다.

비자 런 트립을 마친 사람들은 다시 밴에 올랐다. 국경을 넘어 섬으로 돌아가는 길, 또다시 오랜 시간 고속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야자수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해는 이미 져 어둠이 내렸지만, 가로등 불빛이 길을 밝혔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거대하고 불합리한 시스템 앞에서 느낀 무력감과, 그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는 불안함은 여전했지만, 그 모든 경험 속에서도 그녀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작게 안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돌아갈 곳, 그녀의 섬이, 그녀의 사람들이, 그리고 그녀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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