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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다음 생엔 백인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by 조하나


밴의 덜컹거림이 잦아들고 섬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다시 그녀를 감쌌을 때, 여권 한구석에 찍힌 ‘90일’이라는 숫자는 현실이 되어 그녀 손안에 있었다. 안도감보다는 오히려 묵직한 피로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육지에서 겪었던 그 모든 일들, ‘히틀러’라 불리던 남자의 알 수 없는 권력, 대사관의 무표정한 직원, 그리고 태국 고위층 딸의 나비효과까지. 그 모든 것이 꿈처럼 아득하면서도 살갗에 달라붙은 모래알처럼 선명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섬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전처럼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곳의 본질적인 이방인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소수자’나 ‘약자’라 여겨본 적 없었다. 늘 비슷한 생김새와 생각을 공유하고,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다수가 만들어놓은 질서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 왔던 삶. 이 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조차,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동남아시아’라는, 어쩌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래일 것이라는 은밀한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경을 넘나들며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그 단단했던 무지의 성벽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다. 그녀는 이곳에 결코 완전히 소속될 수 없다는 냉정한 사실을, 마치 밀물에 쓸려온 해초처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겸손해져야 했다. 세상은 그녀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자신은 그저 수많은 경계 중 하나에 서 있는 작은 점일 뿐이라는 것을.

마침내 강사 과정이 시작되는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부터 분주한 기운이 감도는 대형 다이브 센터는 섬의 다른 곳들과는 사뭇 다른 공기를 풍겼다. 코스 디렉터인 맷은 가끔 나타나 인사만 하고 떠났고, 2주간의 강사 개발 과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사람은 캐나다에서 온 또 다른 코스 디렉터, 안드레아였다.

안드레아는 그녀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바비 인형이 현실로 걸어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햇볕에 반짝이는 긴 금발은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은 호수처럼 맑았다. 큰 키에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몸매는 다이버라기보다는 모델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의 완벽한 외모 앞에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강사 과정에 참여한 다른 후보생들은 대부분 맷의 다이브 센터에서 이미 다이브마스터까지 마친 이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서유럽이나 북유럽 국가에서 온 그들은 마치 오랜 친구들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센터 한쪽에 마련된 강의실을 채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그들의 무리 속에서, 그녀는 또다시 홀로 섬처럼 떨어져 나왔다.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유일하게 영어를 하면 어색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고, 안드레아가 강사 과정 전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매일 이론 수업과 제한 수역 및 개방 수역 실습이 병행될 것이며, 특히 프레젠테이션 형식의 발표 수업이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낮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낯선 외국인들 앞에서, 그것도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 잊고 지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과거 한국에서의 치열했던 경쟁의 기억들이 희미한 잔상처럼 떠올랐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남들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야 했던 시간들. 섬으로 도피하듯 떠나왔지만, 결국 이곳에서도 그녀는 또 다른 형태의 시험대 위에 올라선 것이었다.


2주간의 강사 과정은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훨씬 더 빡빡한 스케줄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이론 수업은 생리학, 감압 이론, 물리학, 장비학과 환경학 등 밀도 높은 과학 지식을 영어로 소화해야 했고, 오후에는 제한 수역과 개방 수역을 오가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킬 시연과 평가가 기다렸다. 매일 밤 주어지는 과제들은 다음 날 프레젠테이션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익숙한 한국식 주입식 교육의 기억을 되살려 밤늦도록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수면 부족과 과도한 긴장감에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물속에서 처절하게 물장구를 치면서도 수면 위에서는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처럼, 그녀는 자신의 심리적 압박감을 동료 교육생들에게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하루 일과가 끝나고 익숙한 그녀의 다이빙 센터로 돌아오면, 애써 눌러왔던 감정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클로드와 케빈 앞에서 그녀는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정말 미쳤나 봐. 공부할 게 산더미야. 이건 뭐, 고3 때보다 더한 것 같아! 게다가 전부 영어잖아!” 클로드와 케빈은 그런 그녀의 투정을 허허 웃으며 말없이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차마 용기가 없어 안드레아나 다른 동료들에게 질문하지 못했던 것들, 혹은 어렴풋하게 이해했지만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던 개념들을 밤늦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다정한 눈빛과 격려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녀의 마른 영혼을 적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과정을 밟는 강사 교육생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소외감은 어쩔 수 없었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일은 없었지만, 미묘한 경계선은 분명 존재했다. 그녀가 한국어를 영어로 직역한 듯 어색한 표현을 쓰거나, 발표 중 긴장감에 잠시 입이 떨어지지 않아 숨을 고를 때면, 몇몇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으며 입꼬리를 살짝 비트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이 무시인지, 가벼운 조롱인지, 혹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해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런 미세한 표정 변화마저 놓치지 않는 자신의 예민함을 속으로 원망했다.

어떤 날은 켜켜이 쌓였던 불만이 엉뚱한 곳으로 터져 나왔다. 클로드에게 느닷없이 화풀이를 하는 식이었다. “클로드, 당신은 정말 좋겠다! 태어나서 평생 모국어인 영어만 써도 세상 어디를 가든 아무 불편함 없이 살 수 있잖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가 쓰는 말을 배우려고 기를 쓰고, 어딜 가나 네 나라 사람들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얼마나 편해?” 그건 명백한 질투이자 비아냥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유럽의 예술과 문화를 접하며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거부감은커녕 오히려 동경에 가까운 감정마저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함께 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유럽 백인 친구들에게, 그녀의 모든 것 – 말투, 사고방식, 심지어 농담까지도 – 은 낯설고 이질적인 것투성이일 터였다. 그 일방적인 문화적 익숙함의 간극이 새삼 사무치게 느껴졌다.

과정이 진행될수록, 한국식 경쟁 교육의 망령은 더욱 짙게 그녀를 짓눌렀다.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검열과 비판, 과도한 책임감이 더해졌다. ‘이번이 아니면 영영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거짓말이었다. 이 세상엔 차고도 넘치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철저히 모른 척하는 고난도의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배운 대로, 해왔던 방식 그대로 이 강사 과정을 지독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온갖 스트레스에 허덕였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친구들은 달랐다. 그들은 언제나 과정을 웃으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실수를 해도 “아, 이런! 다음엔 잘하면 되지!” 하고 쿨하게 넘겼고, 옆에서 보기에도 형편없어 보이는 프리젠테이션을 마치고도 “난 꽤 잘한 것 같아!”라며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다. 심지어 평가 점수가 기대에 못 미쳐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그 태도의 차이에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깊은 열등감과 더 큰 압박감을 느꼈다.

칭찬에 목마른 가여운 영혼. 그녀는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했다. 막상 열심히 준비해서 끝내주는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높은 점수를 받아도, 그녀는 잠시 안도할 뿐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했다. 대신 자신이 저지른 사소한 실수, 발음이 살짝 꼬였던 단어, 잠시 머뭇거렸던 순간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강박, 인정욕구,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혐오.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이 지긋지긋한 버릇을 그녀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아주 오랫동안, 교묘하게 가스라이팅 되어 온 완벽주의의 덫에서 그녀는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 강사 준비 과정을 통해 그녀는 그 사실을 더욱 절실히, 뼈아프게 깨달았다.

클로드는 그녀의 끝없는 투정과 자책을 묵묵히 들어주면서도, 때로는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태어나든,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달픈 거야, 친구. 저마다 다른 무게의 짐을 지고, 다른 모양의 그림자를 끌고 살아가는 거지.” 그의 목소리는 잔잔한 밤바다처럼 낮게 깔렸다. 그 말을 들을 때면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의 말속에 담긴 연륜과 체념의 깊이를 가늠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자기 연민과 냉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그녀는 뼈 있는 농담으로 받아치곤 했다. “그래서 말인데, 난 다음 생엔 꼭 ‘백인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클로드.”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공기 중에 잠시 떠돌다 가볍게 흩어지는 듯했지만, 클로드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파이프 담배 연기처럼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백인 남자라… 그건 어떤 마법 주문 같은 건가? 모든 속박으로부터 너를 자유롭게 해줄? 하지만 영혼의 빛깔까지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클로드의 되물음에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농담 속에 숨겨둔 날카로운 진심의 파편을 그가 정확히 짚어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검은 벨벳 위에 흩뿌려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 별들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의 자리를 불평하거나 다른 별이 되기를 꿈꾸지는 않겠지.

“모르겠어, 클로드.” 한참 만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그냥 이 끝없는 자의식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건지도 몰라. 내가 나라는 사실에서 오는 이 피로감으로부터. 백인 남자로 태어난다는 건, 그냥…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모든 불편함과 부당함의 반대편에 서는 가장 손쉬운 상징 같은 거겠지. 누구도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고, 내 말을 의심하지 않고, 내 존재 자체를 신기하거나 낯설게 여기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의 중심에 서는 것.”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다음 생엔 백인 남자라니.’ 뱉어놓고 보니 서글픈 희극의 대사 같았다. 어쩌면 그건 존재의 피부색을 바꾸고 싶다는 소망이 아니라, 이 세계가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위계와 차별의 질서로부터 해방되고픈 절규에 가까웠다. 완전한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아니, 차라리 저기 저 야자수나 이름 모를 바닷새로 태어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따위의 질문으로 밤을 지새우진 않을 테니까.

클로드는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피부색과 언어, 그리고 기억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감옥의 벽이 얼마나 두꺼우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창문을 내고 어떤 하늘을 바라보느냐가 아닐까. 네가 말하는 ‘백인 남자’의 삶에도 그들만의 그림자가 있고, 그들만의 무게가 있을 거야.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또 다른 종류의 속박일 수도 있고.”

그의 말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평생 ‘경계인’으로 살아갈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늘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며, 보이지 않는 유리벽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되물어야 하는 사람.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라면, 설령 다음 생에 소원대로 백인 남자의 피부를 뒤집어쓴다 한들, 그 조건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더욱 교묘하고 안락한 감옥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옅은 웃음을 지었다. “결국, 도망칠 곳은 없다는 거네, 클로드. 내 그림자로부터도, 이 세상으로부터도.”

“도망치는 게 아니라, 끌어안고 춤을 추는 법을 배우는 거지, 친구.” 클로드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말했다. “네 그림자와 함께 말이야.”


강사 과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오후, 그녀는 모든 수업과 과제를 잠시 잊기로 작정하고 스쿠터에 올랐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이기 팝의 ‘Passenger’를 볼륨 높여 틀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자, 눈앞에는 변함없이 반짝이는 수평선과 영원할 것처럼 푸르른 야자수와 정글 숲이 펼쳐졌다.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문득, 어차피 삶을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상처받는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머리가 검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묘한 생각이 스쳤다. 왠지 모르게 그들과의 감정은 덜 깊고, 그래서 상처의 깊이도 얕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관계 자체에서 오는 피로감이나 공허함도, 어쩌면 조금은 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것은 해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어기제이자 슬픈 자기 위안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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