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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증명의 주문

by 조하나


입안에서 굴러가는 영어 단어들의 질감이 사뭇 달라졌음을 느낀 것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강사 시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2주간, 물리학과 생리학의 복잡한 도표 사이를 헤엄치고, 감압 이론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전문 용어들과 씨름했다. 마치 해독 불가능한 암호 같던 그것들이 이제 제법 익숙한 소리가 되어 혀끝을 맴돌았다. 기포가 수면을 향해 떠오르듯, 자연스럽게. 하지만 그 깨달음은 곧이어 더 큰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릿속을 채운 수많은 영어 단어의 활자들. 그것들을 과연 그녀는, 저 푸른 눈의 외국인들 앞에서, 버벅거림 없이, 명료하게, 강사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전달할 수 있을까. 합격한다 한들, 이 서툰 이방인의 영어가 과연 그들에게 온전히 가닿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면, 시험에 대한 중압감은 더욱 검은 심연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오히려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두려움의 크기도 비례하여 커지는 듯했다.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명확한 결과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이 발가벗겨질 것 같은 날것의 불안감. 서울에서부터 질기게 그녀를 따라온 이 지긋지긋한 감정은 열대의 섬이라고 해서 그녀를 순순히 놓아줄 리 없었다. 밤이면, 방갈로 천장의 무늬를 하염없이 세다가 문득 자신이 외웠던 공식들이나 강사 과정 매뉴얼의 문장들이 해변의 게처럼 옆으로 기어가는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 낮에는 애써 태연한 척, 안드레아의 시범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동료 교육생들의 발표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이 시험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검은 잉크처럼 번져나가곤 했다.


시험 전날 밤,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노트와 교재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그녀의 손길은 어딘가 모르게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경건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밤의 장막을 뚫고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고, 멀리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낮게 읊조리는 주문 같았다. 그녀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가장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일 펼쳐질 이틀간의 사투를 위해,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주 작은 평온이라도 그러모아야 했다. 방 안의 작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물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서늘한 감각만이 지금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밤새도록 그녀는 얕은 잠과 불안한 각성 사이를 오갔다. 수없이 뒤척였고, 그때마다 매트리스는 그녀의 신경질적인 움직임을 못 이긴 척 낮게 신음했다. 동이 트기 전, 여느 때처럼 수탉들의 요란한 합창이 섬의 새벽을 갈랐지만, 오늘따라 그 소리는 마치 시험 시작을 알리는 냉정한 공습경보처럼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푸른 여명은 서늘했고, 그 빛깔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스쿠터를 타고 다이빙 센터로 향하는 짧은 길 위에서 마주치는 상쾌한 바람과 햇살, 사람들의 미소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을 테지만, 오늘 아침 그녀의 감각은 오직 시험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지만을 향해 곤두서 있었다. 익숙한 싸이리 비치의 풍경도, 해변을 따라 늘어선 야자수의 그림자도, 심지어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열대 과일의 향기마저도 마치 현실감을 잃은 무대 배경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스쿠터는 마치 그녀의 심장 소리처럼, 평소보다 더 크고 불안한 엔진 소리를 내며 대형 다이브 센터로 향했다.


센터에 도착하자, 이미 형형색색의 다이빙 센터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교육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2주간의 강사 과정을 각자의 센터에서 수료하고 이제 마지막 관문을 위해 모인 그들은, 마치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팀 선수들이 각자의 유니폼을 입고 결전을 앞둔 모습처럼 보였다. 티셔츠의 로고들은 소속감을 넘어선 묘한 자부심과 함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는 듯했다. 대부분 밤새도록 마지막 정리를 한 듯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묘한 흥분과 함께 서늘한 경쟁심이 감돌았다. 그들 대부분은 서유럽이나 북유럽에서 온 이들이었고, 익숙한 언어로 서로 농담을 던지거나 긴장을 푸는 듯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외딴섬이 된 기분이었다. 언어의 장벽 이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문화의 경계, 그리고 소속된 집단의 크기와 명성이 만들어 내는 미묘한 위계. 아무도 그녀를 대놓고 배척하진 않았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녀는 여전히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았다.


다이빙 단체에서 파견된 낯선 얼굴의 시험관들이 평소의 그 바비인형 같던 안드레아와는 다른, 엄격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타나 브리핑을 시작했을 때, 강의실 안의 공기는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첫 번째 시험지가 배부되기를 기다렸다. 이제,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 시험장 한쪽 구석에서 유독 단정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모여 앉은 한 무리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똑같은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맞춰 입은 그들은, 이 섬의 여러 ‘한인샵’에서 강사 과정을 마치고 온 서너 명의 한국인 강사 후보생들이었다. 그들 곁에는 통역사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영어로만 진행되는 시험의 규정 속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려는 고육지책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그림자에는 적잖은 비용이 따랐고, 그 무게는 온전히 후보생들의 어깨 위에 더해지는, 그녀가 이해하기 힘든 한인샵만의 불문율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녀가 형식 강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저들 중 하나로, 통역사의 입을 통해, 어쩌면 반으로 접힌 채 전달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지식과 열정을 전달해야 했을 것이다. 그 아찔한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쉬는 시간, 그들 중 몇몇이 그녀에게 다가와 어색한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저기… 오다가다 몇 번 뵈었는데. 서양인들이 있는 다이빙 센터에 계시죠? 혹시 해외 교포세요?” 그들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적대감보다는 차라리 경계심에 가까운,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어쩔 수 없는 부러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러나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한국에서 나고 평생 자랐어요. 제가 경험했던 한국 다이빙계의 불합리함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어요. 이곳에서, 제 실력만으로 평가받고 싶었어요. 더 나은 강사가 되기 위한 제 선택이에요.” 그녀의 말에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단단함이 묻어났다.


이틀간의 강사 시험은, 웬만하면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통과한다는 속설이 무색하게, 그녀에게는 피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2주간 밤낮으로 파고들었던 이론과 실습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큰 실수 없이 모든 과정을 훌륭한 성적으로 마쳤다. 마지막 평가가 끝나고 모든 것이 정적 속에 잠긴 듯한 순간, 시험관 중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러나 형형한 눈빛을 가진 노년의 영국인 시험관이었다. 그는 그녀가 제출한 이론 시험지와 실기 평가표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나 초! 정말 대단해. 준비를 아주 철저히 했군. 특히 프레젠테이션은 압권이었어. 앞으로 다이빙 강사로서 멋진 커리어를 쌓길 바라네.”


그의 진심 어린 칭찬에 그녀는 순간 목이 메는 듯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시험관님, 사실… 제가 이곳에 와서 영어를 쓰는 서양인에게 다이빙을 가르치는 동양인 여성 강사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반대로, 동양인 교육생을 가르치는 서양인 강사들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지요.” 그녀의 말에는 체념이나 불만이 아닌, 현실에 대한 담담한 관찰과 어쩌면 자신도 넘어서야 할 벽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었다.


시험관은 잠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안경 너머의 눈을 빛내며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 초, 당신이 그 첫 번째가 될 걸세. 그리고 아주 훌륭한 첫 번째가 될 거라고 나는 믿네. 스스로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그의 말은 단순한 격려를 넘어,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인정처럼 다가왔다. 그 어떤 합격 통지서보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보이지 않는 벽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의 무게와 설렘이 동시에 그녀를 감쌌다.


강사 시험이 끝난 날, 꼬따오는 섬 전체가 들썩이는 거대한 파티장이 되었다. 다이빙으로 먹고사는 이 작은 섬에서, 새로운 강사들의 탄생은 그 자체로 축제였다. 싸이리 비치의 바마다 귀를 찢을 듯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고, 국적 불명의 사람들이 뒤섞여 형형색색의 칵테일 잔을 부딪쳤다. 합격의 기쁨에 취한 그녀의 동료들은 섬 곳곳의 바와 클럽을 순례하며 밤새도록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도 잠시 그들의 떠들썩한 열기에 휩쓸려 몇몇 바에서 건네는 축하의 술잔을 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 그녀가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곳. 클로드와 케빈, 안드레와 줄리앙이 있는 작고 소박한 그녀의 다이빙 센터였다.

화려한 축하 파티를 마치고 센터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센터 입구와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여기저기 서툰 솜씨로 매달린 풍선들과, ‘CONGRATULATIONS, HANA!(축하해, 하나!)’라고 적힌 손글씨 메시지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케빈이 환한 웃음으로 그녀를 끌어안았고, 클로드는 평소의 퉁명스러움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것을 아는 그들이 특별히 준비한 무알콜 피냐콜라다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길모퉁이 포장마차의 태국식 닭구이와 쏨땀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쏟아졌다. 지난 2주간의 외로움과 고립감, 한국 사회에서부터 기어이 끌고 온 지독한 경쟁심리와 스스로를 향한 압박감. 그 모든 것을 오롯이 혼자 견뎌냈다는 안도감. 그리고 그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 이렇게 따뜻한 축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어쩌면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감사함과 충만함, 그리고 가슴 벅찬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깊은 파도처럼, 그녀의 온 존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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