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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반짝이는 것들의 무게

by 조하나


한낮의 태양이 야자수 잎사귀 위에 부서지는 은가루처럼 쏟아지고, 코코넛 오일과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섬 전체에 게으르게 스며들던 날이었다. 다이빙 센터의 나른한 정적을 가른 것은, 마치 계절을 잊은 철새처럼, 혹은 먼바다에서 길을 잃은 작은 유리병 편지처럼, 예고 없이 그녀에게 당도한 한 통의 메시지였다.


서울에서, 한때 같은 숨 막히는 마감의 공기를 마시며 연대했던, 이제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며 국내에서 가장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로 떠오른 리나. 그리고 그녀의 화려한 페르소나를 조각하고 유지하는 그림자이자 동반자였던 스타일리스트 지아와, 마법 같은 손길로 평범한 얼굴에 신기루 같은 생기를 불어넣던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민준이,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벽한 휴식’을 위해 이 작은 섬을 방문한다는 짧고 건조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파장을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잠시 잊고 지냈던, 그러나 한때는 생존의 박동처럼 익숙했던 도시의 빠르고 신경질적인 리듬으로 세차게 뛰었다가, 이내 섬의 느긋하고 깊은 파도 소리에 제자리를 찾듯 힘겹게 잦아들었다. ‘그들이 여기에? 이 태초의 맨얼굴을 간직한, 문명의 소음과 계급의 그림자가 희미한 이 작은 섬에 오겠다고?’


며칠 후, 요란한 엔진 소리가 고요한 항구의 아침을 무참히 깨우며 도착한 쾌속선에서 내리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최신 유행을 강요하는 패션 화보 촬영 현장이 섬 전체로 통째로 옮겨온 듯, 지독히도 비현실적이고 어딘가 위태로운 풍경을 연출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금 파리나 밀라노의 런웨이에서 걸어 나온 듯한, 혹은 그녀가 몸담았던 잡지 1면에 대서특필될 법한 최신 명품으로 휘감은 그들은, 태고의 숨결이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나무판자 부두 위에서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쩔쩔맸다.


지아가 신은, 섬의 야생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아찔한 높이의 스틸레토 힐은 판자 틈새에 속절없이 끼이기 일쑤였고, 민준이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애지중지하는 최고급 악어가죽 트렁크는 금방이라도 푸른 바닷속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 잔뜩 치장된 문명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은, 섬의 정직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더욱 도드라져, 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했다. 리나가 들고 온, 서울에서는 몇 달치 월급으로도 구하기 어렵다는 그 눈부신 가방은, 이곳 항구의 생선 비린내와 섬의 흙먼지 앞에서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다. 아무도 그 가방의 로고를 유심히 들여다보거나 그것이 상징하는 부와 지위에 감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파제 끝에서 그들을 맞이하며,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연민과 실소, 그리고 한 가닥 애잔함이 뒤섞인 옅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한때는 선망과 질투가 뒤섞인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그들의 반짝임이, 이제는 어딘가 위태롭고, 그 무게에 스스로 짓눌린 듯 처연하게 버거워 보였다. 그녀가 몸담았던 패션 잡지계는 바로 저런 것이었다. 화려한 가면 뒤에 날카로운 계급의 민낯을 숨기고, 브랜드의 등급이 곧 인간의 가치가 되며, 트렌드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진심과 순수가 짓밟혔던가. 명품과 슈퍼카가 인간의 서열을 매기는 그 공허한 세계. 그녀는 그 숨 막히는 계층 사회의 피라미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섬은, 적어도 그 피상적인 가치들이 힘을 잃는 곳, 최고 속도로 질주할 고속도로 자체가 없어 슈퍼카 따위는 무용지물인 곳, 그 위선과 소모적인 계층 놀이로부터 그녀를 잠시나마 해방시켜 준 곳이었다.


그들의 휴가는, 그녀가 기억하는 도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어딘가 강박적이고 불안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휴식조차 조바심을 내듯, 그들은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려, 아니 어쩌면 낭비할 수 없다는 듯 애썼다. 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외딴 해변, 해외 유명 인플루언서가 다녀가며 ‘인생샷 명소’로 등극했다는 가장 ‘인스타그래머블’한 카페, 해 질 녘 노을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불타오른다는 서쪽 끝 바위 언덕까지, 그들은 마치 정복해야 할 미지의 땅을 점령하러 온 탐험가처럼 섬의 이름난 명소들을 숨 가쁘게 순례했다.


리나가 해변을 걷겠다며 고집스레 신었던 가느다란 굽의 샌들은 여지없이 고운 모래 속에 깊숙이 박혔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흘러내린 마스카라 자국과 함께, 그 모습은 마치 절규하는 뭉크의 그림 속 인물이 열대의 섬으로 잘못 배달된 듯, 처연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하나는 생각했다. 저 반짝이는 것들이 저토록 자신을 옥죄는 족쇄가 될 수도 있음을, 저들은 진정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리고 그 모든 찰나의 순간들은 쉴 새 없이 그들의 최신형 스마트폰 카메라에, 그것도 여러 각도와 필터로 담겨, 완벽하게 보정된 후 실시간으로 SNS 피드를 장식했다. #꼬따오의숨겨진보석 #나를위한선물 #무보정실화라니 #우리만의시크릿파라다이스 같은, 사실은 철저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계산된 해시태그 아래, 기가 막히게 연출된 ‘자연스러운’ 일상의 단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들은 마치 사막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을 찾듯 수시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댓글과 ‘좋아요’ 숫자를 강박적으로 확인했다. 그 모습은 마치, 반짝이는 액정 화면 속 타인의 인정과 관심만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듯, 어딘가 절박하고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문명의 빛이 꺼진 섬의 정직한 어둠 앞에서, 혹은 예고 없이 찾아온 단수 앞에서 그들은 길 잃은 아이처럼 당황했고, 그 불편함은 SNS에 올릴 또 다른 불평의 소재가 될 뿐이었다.


“세상에, 여긴 아무도 우릴 못 알아보니까 너무 편하고 좋다! 지난번 필리핀 갔을 땐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진 찍어주기 바빴거든. 캬~ 이게 진짜 자유지!” 리나가 하얀 모래사장 위에 값비싼 명품 비치타월을 조심스레 펼치고 앉으며,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말에 지아와 민준도 기다렸다는 듯 열렬히 맞장구를 쳤다. 처음 며칠, 그들은 카메라 렌즈의 집요한 감시에서 벗어나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두꺼운 화장과 정교하게 세팅된 헤어스타일 대신 거의 맨얼굴로, 혹은 아무렇게나 질끈 틀어 올린 머리로 섬의 좁은 흙길을 활보하며 잠시 잠깐 ‘보통 사람’의 가볍고 소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끽한 자유의 유효기간은, 마치 섬의 예측 불가능한 스콜처럼 짧았다. 섬의 시간은 그들의 숨 가쁜 도시의 리듬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느릿하고 깊게 흘러갔고, 그들이 문명의 탯줄처럼 여기는 와이파이 신호는 그들의 짧은 인내심만큼이나 희미하고 불안정했다. 간헐적으로, 그러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섬의 정전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의 빛과 소음에 익숙한 그들에게는 거의 재앙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그들을 향해 쏟아지던 뜨거운 시선과 열광적인 환호가 존재하지 않는 섬의 깊고 푸른 고요함은, 그들에게 점차 견디기 힘든 공백과 사무치는 권태로 다가오는 듯했다.


이 섬에선 그 누구도 그들의 이름을 특별한 경외감으로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이 걸친 값비싼 의상과 액세서리의 브랜드를 궁금해하며 “그거 어디서 샀어요?”, “얼마 주고 샀어요?”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플리플랍 한 켤레, 혹은 태양에 그을린 맨발이 가장 자연스러운 이곳의 섬사람들 눈에는, 그들의 과시적인 치장이 그저 기묘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한때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그 모든 속박과도 같은 관심이, 이제는 사무치게 그리운 무엇, 혹은 그들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유일한 거울이 되어버린 듯, 그들의 얼굴에는 시간이 갈수록 알 수 없는 허기와 신경질적인 초조함이 짙게 드리워졌다.


결국, 예정보다 며칠이나 일찍 그들은 섬을 떠났다. 돌아가는 쾌속선 위에서, 그들은 이미 다음 주에 있을 패션 위크와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의 대본 리딩, 그리고 복귀 후 참석해야 할 수많은 브랜드의 화려한 론칭 파티에 대한 이야기로 분주했다. 섬에서의 짧고 강렬했던 일탈은, 그저 그들의 SNS 피드를 장식할 또 하나의 반짝이는, 그러나 곧 잊힐 콘텐츠로 소비되고, 섬의 푸른 기억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질 터였다.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은 값비싼 향수 냄새와 잠깐의 소란, 그리고 그녀에게 남겨진 깊은 상념이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허영을 먹고 자라는 저 모든 반짝이는 사치품들. 그것을 알아보고 열광하는 시선들이 사라진 곳에서, 그것들은 그저 본래의 물질적 가치마저 잃어버린 채 섬의 뜨거운 햇살 아래 놓인,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새삼스레, 그리고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녀 역시 한때는 그들처럼, 새로 나온 뮤지션의 신작 앨범 소식을 하루라도 놓칠세라, 마치 중요한 정보를 놓치면 낙오자가 될 것처럼 전전긍긍했고, 한국 최초로 내한하는 해외 유명 아티스트의 공연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장 앞자리에 앉아 그 순간을 SNS에 인증해야만 직성이 풀렸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밤사이 세상에 쏟아진 온갖 뉴스와 가십들을 강박적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마치 세상의 흐름에서 영원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뒤처지는 듯한 깊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SNS에 자신의 근사한 모습, 타인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해 보이는 찰나의 순간들을 부지런히 전시하며, 보이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공허한 인정을 갈망했었다.


새로 나온 음반을 영영 듣지 못한다 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을 용기. 매진된 공연의 맨 앞자리가 아닌, 방구석의 낡은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빛바랜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을 용기. 세상 모든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지 못해도, 나의 하루는 여전히 온전하고 고요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용기. SNS 속 화려하게 포장된 내가 아닌, 지금 여기, 섬의 햇살에 그을리고 바닷물에 절어 맨얼굴의 초라한 내가, 진정으로 괜찮다고,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고 스스로에게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는 용기. 그녀는 그런 단단하고 깊은,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소설 속 아름다운 문장처럼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그토록 떨쳐내고 싶어 하는, 그러나 여전히 거머리처럼 그녀의 존재 깊숙이 달라붙어 있는 ‘한국인 DNA’에,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해안선의 무늬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각인이었는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증명하고, 더 높고 더 반짝이는 곳을 향해 쉴 새 없이, 숨 가쁘게 달려가야만 한다는, 그 지독하고 익숙한 강박.


하지만 이곳, 태초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작은 외딴섬에서 그녀는 아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발을 내딛고 있었다. 맨발로 대지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거친 모래의 감촉을 기억하고, 온 피부로 작열하는 햇살의 따가움과 차가운 바닷물의 짜릿함을 남김없이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거대한 자연의 장엄한 숨결을 깊이 끌어안으며, 그녀는 아주 느리지만 분명하게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부유하는 외로운 섬이 아니었다. 거친 파도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보이지 않는 뿌리를 바다 깊은 곳으로, 그리고 이 섬의 단단한 땅속으로 내리고 있는 작은 반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섬의 모든 것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모든 복잡한 생각의 무게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과거에 대한 끝없는 후회로부터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존재 자체로 온전히, 그리고 깊이 숨 쉬는 것. 섬의 푸른 숨결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자신만의 투명한 빛깔로 조용히 반짝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것은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요란하거나 현란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값비싼 보석보다 단단하고 영원한 것이었다.




소설 <마이 리틀 아일랜드> 2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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