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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Sep 18. 2024

슬픈 인생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한야 야나기하라(2016). 리틀 라이프. 시공사.

소설을 읽고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77)'가 생각났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기억은 없다. 반대로 여기 인생이 슬프다고 말하는 소설이 있다. 작가가 이걸 노리고 썼지만, 알면서도 읽고 나서 누군가의 인생이 참 버겁다는 생각에 잠시 멍 했었다. 이런 인생이 있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사는 것이 별거 없겠다는 생각도 들고. 소설이 성공한 것 같았다. 잘 써진 소설이란 말인데, 이런 감정을 느끼기까지 몇 번 고비를 넘겼다. 고비? 소설을 읽다가 웬 어려움?


그건 읽다가 지쳤기 때문이다. 읽다가 몇 번 더 읽을까 망설인 건 길이가 길어서만은 아니었다. 소설임을 알고 읽었지만 작가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어도 심한 것 같았다. 작가의 노림수가 성공했어도. 읽다 보면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가 이럴까 싶게 묘사를 했다. 사랑이 꼭 남녀만에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그렇기에 성소수자에 대한 존중도 필요함을, 사회가 활짝 열려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함을 모르지 않건만.


남자끼리 만나 사랑을 하라고 작가가 장려를 하지는 않지만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것 같다. 이 남자 저 남자 만나서 사랑을 나눈다? 이것이 미국의 성문화일까? 이렇게 결과적으로 난잡한 소설은 처음인 것 같다. 분명히 작가는 여자인데 말이다. 어디선가 소설이 오직 창작으로만 이뤄졌다는 칭찬을 하던데. 보통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배경 등을 작가와 어떻게든 연결해서 생각하지만 이 소설 어디에서건 작가를 유추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높은 완성도를 이룬 걸까?


생각하면 이건 일부 맞다. 읽다가 그만둘까 망설이다 끝까지 읽은 건,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 소설의 완성도 때문이다. 여기서 완성도라 함은 작가가 어차피 한 남자가 겪을 수 있는 최대치의 고통을 그에게 주기로 작정했는데, 이것이 성공했다는 말이다. 미국이란 사회에선 동성애가 만연하다 못해 설마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멈추게 만든 건 전적으로 소설 주인공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려서 쓰레기봉투 안에 버려진 주인공 말이다. 누가 그를 수도원 앞에 버렸는지 모르지만, 주드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건 가톨릭 수사들이었다. 실제로 소아성애자 신부들을 묵인한 미국 가톨릭 교구가 빌미를 단단히 제공했으니.


주인공 이름은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다. 참 난감하다. 주드는 성서 상의 유다를 말하고 세인트 프랜시스는 말 그대로 성 프란치스코를 말한다. 이렇게까지 비극성을 연결시키고자 했는지 작가한테 물어보고 싶어도. 소설이라는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싶다. 수도원에서 자라는 주드는 어릴 때부터 성 착취와 학대를 당하다 루크 수사와 수도원을 탈출하는데, 이 루크가 소위 말하는 포주다. 주드의 몸을 팔고 기생하는. 그럼에도 주드를 사랑한다고 하는. 주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수도원 안에서의 학대로 인해 정신적인 피폐를 경험했던 그에게 16세까지 몸을 팔면 벗어난다는 루크 수사 또한 그의 목을 옥 조르는데, 주드가 평생에 걸쳐 왜 발작과 자해를 일삼게 되는지 원인을 제공하는 한 명이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생존을 위해, 더 정확히 그것밖에 할 줄 몰랐던 주드는 자기가 돈을 받고 했던 그 행위들이 결국 강간을 당한 것임을 나중에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그와 함께 유일하게 수도원을 탈주하고, 또한 세상으로부터 보호자를 자처했던 루크 수사가 자살로 세상을 마감한 것만으로도 주드의 상처는 끝나야 했는데,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보스턴으로 가면 구원이 기다리는 듯 가는 도중에 역시나 아동성애자인 트레일러 박사에게 납치를 당해 구금과 강간을 당하고. 이 와중에 운명은 다시 주드를 극단으로 내몰고 그의 다리 또한 평생 불구가 된다. 트레일러 박사가 도망가는 그를 차로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수컷(?)들이 탐하는 잘생긴 얼굴 탓에 얻은 숙명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의 똑똑한 머리. 어느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세상은 그의 불운한 모든 과거를 날릴 수 있는 신세계였다. 그가 스스로 과거를 내뱉지만 않으면 혹은 사회가 그의 과거를 받아들이면, 그의 앞날은 꽃길이 펼쳐져야 하지만. 이것이 가능할 수도 다고 믿은 건 평생 우정과 사랑을 나눌 윌럼, 맬컴, 제이비를 만나면서였다. 배우가 꿈인 윌럼은 나중에 훌륭한 배우가 되면서 주드와 연인이 되고, 맬컴은 훗날 유명한 건축가가 되며, 네 친구들 관계를 잠시 균열시키는 제이비는 역시나 화가로써 각자 멋진 인생을 구가한다. 이렇게 끝났으면 좋으련만.


주인공 주드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학대와 성 착취로 이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좋은 인품과 뛰어난 머리로 출세를 하면서도 그의 어두운 과거로 인해 자해와 발작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신적인 고통을 소설 내내 보여준다. 자신의 과거를 남들이 알면 관계가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이 그렇게 남성들에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의 성 정체성으로 인해 남자와 사랑에 빠져 엄청난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는 건 그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항상 돌봐주는 정형외과 의사 앤디와 양부모 헤럴드와 줄리아, 그를 어떻게든 인내하고 받아들여 주는 친구들, 특히 뛰어난 변호사로서 로펌에서의 성과는 주드를 어느 정도 정상인으로 살아가게도 하지만. 지난 상처가 준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뚝 서지 못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윌럼과의 관계가 우정을 넘어 사랑하는 관계까지 보여주며, 주드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는 순간, 소설은 결론을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이럴 거면서 그 과정들을 지난하게 그린 이유가 지나친 건 아닌지. 그런데 이것이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는 수단이 되다니. 그 과정을 이렇게 길게 쓸 수 있다니. 아이러니다. 읽는 독자에겐 이런 장치들이 굳이 그렇게 길게 필요한지 의문이 남으니 책을 쉽게 완독 하지 못한 것이다. 이 부분이 지겹다는 생각도 했고.


책을 다 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고, 주인공 주드를 끝까지 몰아가는 슬픔이 결국 전체적으로 잘 빗은 소설이 되었지만, 주드가 53세의 나이로 죽은 이후 앤디가 3년 후 심장마비로, 리처드는 2년 뒤 뇌암으로 죽었다는 얘기를 읽으면서 뭔가 과했다는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물론, 이 마지막 장을 주드가 아닌 헤럴드가 내레이션을 맡음으로써 슬픔이 더 배가되는 노련함을 보여줌에도. 그럼에도 주인공 주드의 인생을 극단으로 몰고 가서 종국에는 비극적인 서사가 되는 결론은, 슬픔도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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