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이 특별하다. 그라나다에 갔더니 레콩키스타가 완성된 해가 그때라서 이사벨 1세 여왕의 치적을 알게 되고, 그곳 이사벨 광장에 여왕이 후원을 약속한 대항해 협약을 맺는 인물로 콜럼버스를 등장시킨 것도, 신대륙을 발견한답시고 인도로 떠난 해가 1492년 8월인데 그 떠난 장소가 세비야라는 것도, 그곳에 있는 과달키비르 강에서 출발해서 항구 도시 카디스에서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 그가 인도인 줄 알고 내렸더니 그곳은 바하마 제도에 속한 산살바도르 섬이었다는. 그날이 1492년 10월 12일이라고 하니, 스페인이 통일을 이루기 시작한 원년이야 그렇다 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랍시고 첫발을 내디딘 연도라서 각별하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한 땅을 아메리카로 부르니 그건 그 가문에 영광인 건 알겠지만, 풍운아 콜럼버스가 세상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것 같다. 원래 있던 땅을 신대륙이라 부른 서양의 무례함은 이제 와서 뭐라고 할 수 없어도, 그라나다에서 맺은 산타페 협약으로 발생한 나비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그걸 못 보고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가 죽었으니 세상이 요지경이다. 그 변화의 중심인물 콜럼버스. 그는 탐험가, 항해사이면서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이다. 정말 중요한 단어, 정복자. 스페인 입장에서 듣기 좋은 레콩키스타와 연결되는 단어. 공도 많지만 과도 많은 인물.
지금 중남미와 미국 남부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왜 이렇게 된 거지? 항해가 2~4차로 늘어나면서 금과 향신료가 부족해지자 대신 선택한 게 상품으로써 사람이었다. 카리브해 노예무역도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누가 그랬지? 그러니 중남미 사람들에게 콜럼버스는 콩키스타도르였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스페인에겐 엄청 인기남 아니었을까? 죽어서 그랬지만. 그라나다뿐만 아니라 마드리드의 동상, 바르셀로나의 기념비 등을 세운 이유 말이다. 첫발을 내디딘 그로 인해 스페인은 그들이 신대륙이라 부른 그곳에서 많은 자원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그걸 기반으로 세계를 한때 호령한다. 15~16세기에 말이다. 그때 활개 친 게 무적함대. 콜럼버스가 뿌린 씨앗 덕이다.
그런 그의 무덤이 세비야에 있다. 세비야 대성당 안에 있는데, 붕~ 떠있다. 공중부양으로 떠있는 건 아니고 네 명이 받치고 있는데, 이걸 받친 이들이 평범하지 않다. 당시 왕국들인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국의 왕 들이다. 그런데 앞의 두 왕은 고개를 기꺼이 쳐들고, 뒤에 왕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쩔 수 없어서 관을 들고 있는 모습 같다. 이들에게 무슨 사연이? 콜럼버스 항해를 찬성했냐 안 했냐 차이라는데, 이사벨 여왕이 죽고 그에 준 모든 혜택과 약속이 사라지자 속된 말로 더러워서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고 했다나? 이건 생전에 그의 성과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그런 것인데 사후엔 그가 남긴 후과를 인정해서 유해를 스페인에 다시 모신 거라고. 처음에 죽자 세비야 수도원에 안치했다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갔다가, 쿠바로 갔다가, 세비야 대성당에 다시 옮겨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스와 미국과 싸운 전쟁에서 졌다고 해도, 굳이 무덤까지 옮겨야 했는지는 글쎄다!
세비야 대성당이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성당이면서 유럽 3대 성당이라니 반드시 봐야 하고, 히랄다 탑은 당연히 무료라도 너도나도 올라가는 건 결정적으로 계단이 아닌 경사로라서 그럴 수 있다. 34층 높이 98m을 단숨에 올라갈 수 없지만, 그러니 옛날엔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다는 특이함과 함께, 궁으로 불리는 알카사르 또한 비슷한 단어인 알카사바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전에 콜럼버스 관을 더 언급하고 싶은 건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 사람이라도, 자기 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에 세비야 대성당에 모신 거야 그럴 수 있는데, 그 존중의 방식이 우리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관을 들고 있는 왕들이 누군 웃는 듯 누군 찡그리는 듯이 묘사한 그 유머와 해학에 더해 그가 원했듯이 스페인에 묻히지 않겠다는 유지를 충실히(?) 받들어 네 명의 왕이 떠받치게 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온 걸까?
산타마리아 주교좌성당인 세비야 성당은 1172년에 완공한 이슬람의 모스크 위에 지었다. 레콩키스타로 이슬람 세력을 물리쳤으니, 그 흔적 위에 가톨릭 왕국의 영화를 드러내고 싶었으니. 그때가 1401년이라고 한다. 유럽의 많은 스타급 성당들이 사실은 배후 도시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성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유행을 따른 것인데, 종교가 이러면 어떡하냐고 묻지 마시라. 그땐 가톨릭이 왕권과 결탁도 많이 했느니. 중요한 건 우리가 그렇게 남겨진 유산을 즐기고 있지 않던가? 세비야 성당도 그 영향하에 있었으니, 그리 멋진 성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히랄다 탑이 아름답다. 탑 꼭대기에 어여쁜(?) 청동으로 만든 여인상이 뭔가 했더니 풍향계란다. 그 말이 엘 히랄디요란 말이고. 그러니 히랄다 탑인데, 이 탑 또한 짬뽕이다. 옆 대성당처럼 이슬람 첨탑이었다가, 그때 높이가 73m였는데 세비야를 카스티야가 1248년 정복하고 난 후 기독교 시설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증축을 해서 98m라고 되었다고. 굳이 높은 곳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건 내려다보려고 해서 그런 것 아닐까? 처음에야 종교적인 상징과 의미로 높은 곳에 계시는 그분을 위해 위엄과 존경을 표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 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종교와 믿음에 대해 사심(?)이 없는지라 그저 내려다보고 싶은 것이다. 살다 보면 밟히고 시달리며 살아왔으니, 여행을 기회로 이때 너희들 다 내 발밑에 있어,라고 호기를 부려봄도 좋지 않던가?
그럼 콜럼버스는 어떻게 죽었을까? 매독균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더해서 56세에 죽었으니, 죗값을 치르고 죽은 걸까? 그의 인생 말년에 그는 많은 악행을 저질렀던데, 뭐든 끝이 좋아야 한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너무 교훈적이라고? 냉혹한 현실은 감성적이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 같다. 그러니 아래 사진을 한번 봐줬으면 한다. 세비야에 있는 스페인 광장에 가면 벽면에 스페인의 각 도시들을 타일로 묘사를 해놨다. 아래 사진은 그중에서 그라나다를 찍은 것이다.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즈가 1882년에 그린 그라나다의 항복이란 그림을 그대로 본뜬 것인데, 이 그림이 걸려있는 곳은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 로비이다.
실제로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1479년 서로 합병해서 힘을 합치지 못했다면, 1492년 그라나다 마지막 이슬람 나스리 왕국이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그라나다 왕국이 무너짐으로 해서 레콩기스타가 완성되고, 스페인은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힘을 갖고자 한 것이데, 그러니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를 지원한 거였다. 비록 그가 발견한 곳이 인도가 아니고,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터럭만큼이라도 연민이 들었을까?
세비야는 듣던 대로 아름다운 도시이다. 작으나 예쁜 도시 옆에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을 통해 콜럼버스가 첫 항해를 떠난 곳이 세비야라는 걸 모르고 간 것이다. 콜럼버스가 누군지 몰랐겠는가? 그가 이곳 세비야에서 항해를 준비하고, 세비야가 한동안 대서양으로 나가는 발판이었다는 걸 미리 알고 갔다면 세비야가 다르게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남으니, 이런 걸 미련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