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도 제르모소 대피소 가는 길

by 길문

오늘은 산에서 자는 마지막 날이다. 그걸 위해 대피소 콜라도 제르모소(Collado Jermoso refuge)를 가는 여정은 장엄하다. 걷다 보면 피코스의 주인은 인간이 아님을 자연히 알게 된다. 바위 봉우리, 절벽, 가파른 암석 단면, 날카로운 산맥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걷다 보면 계속 보게 되는 베가 데 리오르데스(Vega de Liordes) 산맥이 주는 광활함에 취하게 된다. 걸어서 페다베호(Pedabejo)라 불리는 광대한 운하를 지나면 남는 건 콜라디나스(Colladinas) 산맥에 붙어있는 절벽길, 그 길을 따라 걸어야 콜라도 제르모소가 나온다. 이번 트레킹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멋과 풍경을 경험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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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잠을 잤던 산타 마리나 발데온과 판데트라비 산으로 가는 길.


Please open the gate!

아침을 먹고 짐을 챙기다 보니 뭐가 빠진 것 같았다. 뭐였더라? 아, 등산 스틱! 이걸 어디다 두었지? 현지 회사에서 빌린 폐품처리 전단계 스틱이었지만 요긴하게 써먹었으니 마지막까지 챙겨서 돌려줘야 했다. 혹시나 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구조가 1층이 로비를 겸하면서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고, 2층에는 거실과 식당이, 3층에 잠자는 방들이 있는 형태였다. 스틱을 들고 올라온 기억이 없어 1층 건물 안에 있겠지 하고 내려가니 보이지 않았다. 잃어버렸나? 그러다 밖에 나가보려고 했다. 어제 건물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깐 쉬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려면 당연히 문을 열어야 했다. 아침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거대한 바위 사이에 놓인 길을 따라 산을 넘어가야 한다.

보기에도 육중해 보이는 문을 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나가면 그냥 그 문이 닫힐 것 같았다. 밖에서 문을 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스틱을 찾아야 해서 이리저리 문을 만지니 열렸다.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순간 문을 받쳐놓고 나가라고 머리가 명령을 내렸는데 몸이 그걸 따르지 않았다. 마땅히 지지해 줄 돌이나 쇠꼬챙이가 보이지 않았었다. 에라 하고 나갔더니 역시나 그대로 문이 닫혔다. 스틱은 어제 앉던 의자 옆에 놓여 있었다. 그것까지 좋았으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밖에서 문을 열 수 없는 구조였다. 초인종이나 도어 벨 등 어떤 것도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페다베호 운하.

난감했다. 소리를 지른 들 삼층까지 전달될 구조가 아니었다. 나무로 만든 문이지만 두꺼워 두들겨도 소용이 없었다. 다들 떠날 채비를 하느라 남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 같아서, 잠시 생각하다 뭔가 떠올랐다. 내가 스마트폰을 가져온 것이다. 트레킹을 같이 하는 동료들은 서로 WhatsApp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문자를 보내자. 이런 생각이 나자마다 바로 실행했다. 이번엔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몸이 따랐다. Please open the gate! 아주 짧은 문장이라서 생각하고 말고 가 있겠는가.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몇 분도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키가 작은 피터였다. 런던 금융가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한다는 그가 나를 보자마자 낄낄거렸다. 너 한국말로 문 열어달라고 외쳤지, 하면서. 피터는 트레킹을 하는 동안에도 자주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러니 넘겨짚었었다. 여자 친구지?라는 질문에 벨기에 여자라고 말했던 그가 와준 것이다. 트레킹 내내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눈 그였기에 그랬나 싶다.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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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코스 데 에우로파의 진짜 주인들. 오른쪽이 샤무아. 산에 사는 영양이다. 걷는 내내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

그렇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건, 반대로 밖으로 나오건 문을 열어야 한다. 세상 이치가 뭐든지 우선 마음의 문을 열고, 육체를 움직여 세상에 나가야 한다는. 세상과 당당히 맞서야 한다는, 그것이 뭐가 되었건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 얘기가 무거워졌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페다베호. 이때까지도 갈 길이 험난 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

피코스 데 에우로파에 몇 개의 대피소 혹은 산장이 있는지 잘 모른다. 시설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오늘 머물 대피소는 시그니처 대피소로 알려져 있다. 도대체 얼마나 멋지기에. 숙소를 나서 걸을 때 순탄했다. 산 쪽으로 난 길을 걸어가니 그 길 이름이 판데트라비 패스였다. 그걸 따라 좀 더 걸으니 목장이 나왔다. 아마 소를 키우는 곳 같은데, 휑했다. 겨울맞이를 위해 소를 산 아래로 옮겼나? 아무것도 없는 곳을 지나 한참을 걸으니 저 멀리 산맥 사이로 급경사 언덕길이 보였다. 그곳에 도착해서 가파른 그곳을 낑낑거리고 올라가는데, 누가 내려오고 있었다. 독일에서 왔다는 젊어 보이는 그는 혼자 걷는 중이라고 했다. 기개가 대견했다. 내가 그처럼 젊었어도 혼자 왔을까?

키가 아주 큰 피트가 가이드 하이메와 마지막으로 걸어오는 모습.

이런 생각도 하며 고개를 넘으니 중간중간에 눈이 많이 쌓인 지역이 나왔다. 지금까지 멀리서 보이던 설산 중 한 곳에 들어선 것이다. 급경사를 오르고 다시 내리막을 거쳐 완만한 지형을 이리저리 걷다 보니 아주 드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였다. 그곳이 페다베호였다. 움푹 꺼진 그곳은 지반이 침하되면서 생겨난 지형으로, 만약 그곳을 물로 채운다면 배가 오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광대했다. 그래서 운하라고 칭했던 걸까? 그렇게 운하라 불리는 그곳 맞은편이 코랄디나스 절벽이었다. 거대한 바위가 통째로 눌러앉은 것 같은 직벽에 가까운 모습. 그때까지 그 절벽을 따라올라 걷는 줄 몰랐다. 멀리서 보니 절벽 밑에 하얀 실선처럼 보이는 길로 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 길은 푸엔테 데로 가는 길이었다. 오른편으로 페다베호를 끼고 끝까지 걸으니 이정표가 나왔다. 아까 뒤에서 봤던 곳까지 걸어온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던가 위로 올라가던가. 선택지는 두 개였다. 위로 올라가? 나중에서야 위로 절벽을 넘는 건 아니고 그 절벽을 따라 왼쪽으로 걸어야 오늘 예정된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절벽 쪽으로 올라갈 때 까지만 쫄지 않았다. 우리 일행보다 앞서서 여성 두 명이 스틱도 없이 우리 앞을 휘리릭 지나갔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면 위험한 구간은 다 지난 것이다.

바위투성이 길을 올라가면 갈수록 내려다보는 경치는 좋아지는데, 비례해서 밑이 점점 까마득해 보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간혹 뉴스에 나오지 않던가. 셀카 찍으려다 떨어져 세상을 먼저 떠났다는 내용들. 그러니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길은 외길이라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냥 앞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스틱을 든 두 손에 힘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두를 수도 없고, 그저 천천히 걷는데 앞에서 걷던 여성 두 명이 순간 보이지 않았다. 어라? 그때 카를로스가 사람들이 궁금해할지 어떻게 알았는지 얘기를 했다. 막힌 것 같은 그 길 끝에 가면 길이 아래로 연결된다고. 그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까? 몸은 자꾸만 오른편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니 걷는 것이 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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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를 넘어야 대피소가 나온다.

여성 두 명이 보이지 않던 구간부터 내리막이었는데, 눈이 쌓여 있었다. 앞장을 선 카를로스가 자기 발로 일일이 디딤 자리를 만들어주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그게 대수던가. 그렇게 꾸역꾸역 걷다 대피소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면 절벽 끝에 걸터앉은 것 같은 모양 그대로 그곳에 있던 대피소, 시그니처 그 자체였다. 달리 표현할 말이 마땅하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콜라도 제르모스. 그곳이 얻은 명성은 하나 더 있었다. 대피소 뒤편 산등성이가 해넘이 명소였다. 남들이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너도 나도 대피소 뒤편 산으로 가길래 따라갔다가 난 바로 내려왔다. 해넘이가 형편없어서? 추웠다. 추우니 해넘이고 낭만이고. 가벼운 배낭을 지고 걸은 원죄. 덜덜 떨리는 몸을 서둘러 대피소 안으로 옮겨 놓았다.

해넘이 명소라는데 추워서 바로 돌아갔다.

대피소 잠자리는 사실 최악이었다. 잠자리가 좁아 서로 몸을 댈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번호를 뽑아 잠자리를 정했다. 특이하지? 잠자리를 뽑기로? 내가 뽑은 번호 옆이 바로 뚱뚱한 크리스 형님 잠자리였다. 잠을 자기 전 반갑게 맞이해 준 그와 같이 자는 건 내겐 도전이었다. 왜냐고? 그는 키가 크지 않았으나 몸이 뚱뚱했으니, 내 자리가 위협을 받았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널찍한 마루 같은 곳에 번호 붙여놓고 그것에 맞춰 잠을 자야 하니 신체조건에 따라 잠자리 지형이 달라진 걸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 유레카였다. 그게 뭐냐고? 그와 머리 방향을 반대로 한 것이다. 그러다 발로 얼굴을 차일 수도 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코골이도 없던 그날 또한 과거가 되었다.

숨은 대피소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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