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오(Jario) 봉우리에서 세상에 외치다. 뭐라고?

by 길문

누가 알면 K2(8,611미터) 정도 올라갔는 줄 알겠다. 겨우 6,276피트 올라가 놓고. 단위를 피트로 하니 좀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1,913미터는 한라산보다도 낮다. 그러니 실망을 했냐고? 어제, 그제 날씨 덕에 피코스 데 에우로파(유럽의 봉우리)에 온 건지 오지 않은 건지 의심이 들던 참에 마침내 봉우리에 올랐다. 이름은 하리오 봉우리(The peak of Jario). 이 맛이다. 트레킹이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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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가바뇨 대피소 입구와 뒷태.

어느 날 누가 물었다. 둘레길하고 트레킹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워킹, 하이킹, 트레킹은 알겠는데, 둘레길이라 하니 갑자기 툭 튀어나온 단어 같다. 셰릴 스트레이드가 쓴 《와일드》(2012)를 읽고, 언젠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길을 둘레길이라고 하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4,285km)이 화를 냈을 텐데, 그나마 영어로 트레일이 둘레길에 가장 가까운 단어 아닐까? 오늘은 트레킹이 등산(climimg)과 다르다는 걸 체험한 날이다. 걷다가 봉우리 하나 정상에 오른다는 건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말과 같아서 기분이 상쾌하다.

하리오 봉우리를 향해 걷다 한 컷.

그렇게 올랐더니, 웬 남자가 청승맞게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앉아있길래 물어봤다. 너 어디서 왔냐고? 영국이란다. 영국인들이 여기에 왜 이렇게 많을까? 나중에서야 이곳에 왜 영국인들이 많은지 알았다. 우리가 스페인에 가려면 직항노선으로도 14시간 정도 걸리지만, 영국에서 이곳에 오가는 건 2~3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니 산행 중이나 숙소에서 영국인들을 많이 만난 것이다. 하나 더. 듣자니 런던엔 산이 없다고 한다. 교외로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가봐도 시원찮은 가보다. 우린 서울에도 국립공원이 있는데 말이다. 원래 유럽에서 국가 간 거리가 멀지 않으니, 자주 해외에 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앞글에서 같이 길을 걷는 일행 13명 모두 영국인 줄 알았다고 했었는데, 벨기에, 호주, 아일랜드 사람도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우리가 그렇듯이 외국인들도 동양인들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피부가 하얗다고 다 영국인이라고 생각을 했으니.

고지가 바로 코 앞이다.

오늘 일정은 숙소 베가바뇨 대피소에서 산타 마리나 데 발데온까지 950미터 오르고, 950미터 내려가는 일정이다. 높이로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아서 가볍게 숙소를 나섰다. 어제 들어간 대피소 입구를 두고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닭들이 눈에 보였다. 그 후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것 같은 정겨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니 금방 포사다 데 발데온에 도착한 듯해서 시계를 보니 무려 8시간 30분 정도를 걸은 것이다. 오르고 내리는 높이가 낮았을 뿐 거리는 아주 길쭉했던 것이다. 밑변이 아주 긴 삼각형을 생각하면 될 듯했는데, 이런 건 주변 풍광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더해서 걷는 맛을 제대로 느끼게 만든 건 날씨였다.

걷는 그대들 예술이다!

오늘은 전혀 배낭에서 옷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날씨가 좋지 않아서 모두들 걷다가 비가 오면 옷을 바꿔 입고, 날씨가 괜찮으면 더우니 옷을 벗느라고 부산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그렇게 포사 데 발데온에 도착했다. 다들 마을 중심가에 있는 바르(Bar)에서 역시나 영 사이드와 위즈덤 사이드가 서로 분별해서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번에 난 위즈덤 사이드에 앉아 띤또 베라노를 시키고, 남들은 어김없이 맥주를 마시고, 샌드위치를 안주 삼아 깨끗이 먹어치웠다. 샌드위치? 점심때 먹지 않았어? 매번 저녁때 가이드가 내일 점심으로 뭘 주문할지 물어봤는데, 종류만 다섯 가지 샌드위치를 돌아가며 먹는 것도 재미있었다. 초리소부터 하몽을 포함 햄과 치즈까지. 그런데 그걸 남겨? 한 번에 먹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샌드위치 크기가 커도 너무 컸다. 누구도 음식을 산에 버리지 않았으니 그들도 다 먹었을까?

정상에서 망중한?

샌드위치 크기가 내 얼굴보다 항상 더 컸다. 그래서 어떤 날은 우리끼리 깔깔 웃기도 했다. 가이드 카를로스가 저녁 식사 전에 내일 먹을 피크닉 박스 주문을 받으러 다녔다. 그러면 누가 Same Size? 하고 웃었던 것이다. 빵이 주식인 영국인들이 봐도 빵의 크기가 커도 아주 컸다. 그런 빵은 화덕에서 굽고 그걸 잘게 잘랐을 것이다. 그러니 한 번에 먹을 수가 없었다. 키가 아주 큰 피터도 내가 샌드위치를 먹으니 그도 가방에서 꺼내 먹었다. 초콜릿이나 캔디 혹은 과자에 과일로는 사과 하나 정도, 여기에 작은 음료수가 들어가기도 한 피크닉 박스는 먹을만했다. 걷다 보니 다들 배가 고플 테고, 그러니 뭔들 맛이 없었을까? 그렇게 쉬고 있는데, 가이드가 피코스 데 에우로파 전시관에 가자고 한다. 국립공원 전시관? 정말 놀랍도록 잘해놨다. 어떻게 국립공원이 만들어졌는지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답게 동식물뿐만 아니라, 석회암과 관련된 지질에 대한 내용까지 완벽했다. 더구나 무료다. 무료!

20250924_130701.jpg 즐거운 점심시간.

그런 후 숙소가 있는 산타 마리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카를로스가 15분 정도 걷는다고 했는데, 웬걸? 30분 이상 걸었던 것 같다. 그것도 오르막길을. 그럼 오늘 걷는 시간만 9시간을 넘게 걸었다는 건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숙소에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다. 위즈덤 사이드는 맥주를 한 잔씩 더 하는 것 같기에 난 영 사이드에 합류했다. 그러니 어땠겠는가? 아주 당연히 숙소에 일찍 도착했다. 그럼 뭐가 가능했지? 맞다. 잠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 그랬기에 좋은 잠자리 맡았겠지? 이런! 그럴 필요가 없었다. 4인 1실 구조였다. 이층 침대. 이번엔 잔머리를 굴려 호기롭게 1층 침대를 선택했다. 그러니 샤워시설과 식당 설비까지 완벽한 줄 알았지? 아니었다. 바로 그 침대. 세상에나! 잔머리를 굴려 선택한 1층 자리가 낮아도 너무 낮았다. 2층과의 높이가 그랬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들 수 없었다. 그냥 침대에 앉으면서 바로 누워야 했다.

포사 데 발데온의 든든한 뒷배 Pico Torre de Los Traviesos.

빌어먹...... 을. 나름 머리를 굴렸는데, 침대에 앉아 쉴 수가 없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영 사이드 몇 명이 리빙룸에 앉아 쉬고 있어, 그쪽으로 가려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일행 두 명을 만났다. 그들이었다. 첫날밤을 숙소에서 함께(?) 보냈던 영국인들 중 두 명.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아는 것으로 봐서 그때 잠시 대화를 나눴었나 보다. 반가웠다. 며칠만이지? 그들 왈 자기들은 내일 트레킹을 끝내고 돌아간다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들은 그다음 날 우리가 원래 넘기로 했던 뒤쪽 산으로 가긴 갔었다고 했다. 그러니 넘었을까? 우린 이미 산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 미리 포기를 했던 것인데, 그들은 그런 정보 없이 계획대로 움직이려고 했던 것 같다. 산 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고. 알아 미리 포기한 자들과 몰라 시도하다 포기한 자들!

포사다 데 발데온에 도착하다.

잠시 쉬다 내일을 위해 돌아와 잠을 자긴 잤는데, 다음 날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잠을 푹 자지 못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 산행 중에 만난 숙소 중 가장 좋았는데, 범인은 침대였다. 위층과의 높이가 낮아도 원래 침대 용도가 잠자는 거라서 그냥 자려고 했는데, 위를 올려다보니 세상에 침대 밑이 얼기설기 철사로 엮어만든 형태였다. 그냥 나무를 통자로 깐 후 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놨으면 될걸, 나름 푹신하라고 침대를 철사로 만들어놨으니 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놔도 위에서 움직이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원래 수면 패턴이 푹 자다 선잠 자다 하는 형태라서, 선잠을 잘 때마다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침대에서 나는 소리. 삐걱삐걱 거리는 소리를 밤새 말이다. 내 침대도 그랬겠지만 내 밑엔 아무도 없으니.

피코스 데 에우로파 전시관에서 바라본 Torre de los Horcados Rojos?

원래 사람이 잘 때 이리저리 뒤척이는 건 정상이라서 그랬더라도 소리가 크게 들렸던 건 2층에서 잤던 벨기에 친구 세드릭(Cedric)이 한 덩치 했다. 큰 몸으로 움직였으니 소리는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눈을 마주칠 때 인사를 하며 한 마디 하려다 먼저 당했다. 그가 내 잔꾀를 미리 파악한 건지, 짧은 영어로 뭐라고 말할까 생각했던 그 순간을 알아챈 건지. 그가 한 말. 너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너 코 골았어! 많이 골았다는 건지, 그러니 잠을 자지 못했다는 건지. 순간, 억울해 울컥했다. 먼저 말하지 못해서였다. 야, 세드릭. 삐걱거리다가 영어로 바로 생각이 났겠냐고? 그러니 외쳐야 했다. 세상에 대고 말이다. 누군 오겡끼데스까를 외쳤지만. 난 억울하다고. 억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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