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요, 산타마리아 성당.
영 사이드(young side)와 위즈덤 사이드(wisdom side)가 홍해처럼 갈라질 때는 주로 숙소에서였다. 첫째 날도 그랬고 둘째 날도 그랬고, 남은 날들도 계속 그랬다. 체력 차이 때문일까? 걷다 보면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이 항상 앞서갔다. 이 말인즉, 나이 많은 축에 드는 사람들은 항상 대피소나 숙소에 늦게 도착했다는 말이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날과 마지막 날 숙소는 2인 1실이었다. 그러니 굳이 빨리 걸을 필요도 없이 자기 보폭으로 걸으면 되었다. 좋은 자리가 따로 없으니. 그럼 다른 날들은? 처음부터 이걸 유심히 지켜본 건 아니었다. 같이 시간을 보내니 두 집단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나뉜 건 자연스럽고 본능 같았다.
영 사이드와 위즈덤 사이드라고 처음 말한 건 뚱뚱한 크리스였다. 60보다 70에 가까운 나이인 그는 첫날 저녁을 먹을 때 내 옆에 앉아 따듯한 대화를 나눈 바로 그 형님이었다. 걷는 중간중간에 눈을 마주칠 때 썰렁한 내 농담을 웃어가며 받아준 그가 한 말이었다. 자기는 위즈덤 사이드라고 말하기에 바로 알아듣긴 했지만, 그저 그날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정말 그렇게 나뉘기 시작했다. 영 사이드와 위즈덤 사이드로 말이다. 대피소건 숙소건 무조건 선착순(first come, first serve)이었다. 젊건 늙건 모두들 이걸 따랐다. 그러니, 영 사이드 친구들이 좋은 잠자리를 항상 차지했다. 반대로 위즈덤 사이드는 역시나 지혜가 몸에 배에 있어서 그런지 정말 군말이 없었다. 펍에 들렀을 때도 예외 없이 따로 앉았는데, 그렇다고 서로 싫어서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나이에 따라 어울리는 그룹이 달라지다니. 그럼 난 어느 쪽과 주로 어울렸을까?
코바동가를 떠나 저녁 무렵 도착한 베가바뇨 대피소도 말 그대로 그냥 대피소였다. 뭘 더 바랄까. 난 늦게 도착했으니 잠자리는 구석방 이층? 이걸 이층이라고 부르기가 그렇다고 이층 침대라고도 부르기도 이상한 형태지만 방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머리 위 자리였다. 그곳에 침대는 당연히 없었고. 평상 같은 곳에 이부자리만 깔려있는 형태였다. 사람을 최대한 많이 수용하려고 한 것 같은 숙소. 내 자리에서 화장실이나 식당까지 한번 움직이는 것도 정말 일이었다. 나보다 키가 한참 큰 다른 3명의 다리를 요리조리 피하고 건넌 후 계단을 내려가서 1층 거주자들 눈초리를 피해 문쪽으로 걸은 후 아주 조용히 그걸 여닫고 움직여야 했지만. 이번 여행엔 나 자신도 놀랍게 이런 불편함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굳이 빨리 걸어 숙소에 도착하고 싶지도 않았다. 뭔가 쫓기듯 조바심 내며 살아 몸에 밴 습관을 여기까지 와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곳은 샤워시설이 특이했다. 5유로라도 걷다가 흘린 땀을 씻어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대피소 입구에서 다들 바통을 터치하듯 기다리는 것이 이상하긴 했는데, 마지막인 듯 차례가 되어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가보니. 가이드가 말한 것처럼 샤워시설이 야외에 있었다. 그러니 건물 입구에서 순서를 기다렸던 것이다. 뜨거운 물은 식당에서 끓여서 관으로 공급하는 방식이라서, 후다닥 샤워를 해야 했다. 혹시나 따듯한 물이 끊어지면 찻물로 샤워를 해야 하니까. 그렇게 샤워를 하는데 옆에서 물소리가 났다. 굳이 좋게 말하면 샤워 부스가 두 개였던 것인데, 온몸을 거품으로 만들다 빈틈으로 슬쩍 보니, 누가 있는데 남성 같지 않았다. 그럼 중성의 누군가? 더 봤다가 상대가 눈치를 채면 디지털 성범죄자로 몰릴 것 같았다.
스마트 폰이 없었기에 다행이긴 했는데, 그곳까지 스페인 경찰이 출동해서 나를 포승줄로 묶어 경찰서로 이송하고 다음 날 대문짝만 하게 현지 신문에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자칭 양반 출신이란 놈이 상놈도 하지 않는 짓거리를 했다가 걸렸다는 뉴스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서둘렀다. 후다닥 물기를 제거하고 대충 속옷을 걸친 후 사라지려 거죽대기 같은 걸 걷어내고 나오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린 건 찰나였다. 그때 눈에 들어온 뻥 뚫린 공간, 시야에 걸릴 게 없었던 그곳이 좋았다. 여유가 없었나? 오늘 내가 묶을 대피소 주변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내가 묶을 대피소 옆이 바로 드넓은 목장이었다.
숙소에서 에놀호수까지 되돌아가는 길은 상쾌했다. 통상 왔던 길을 다시 가는 트레킹을 누가 좋아할까만은, 어쩔 수도 없었지만. 언제 이런 경치를 다시 볼까라는 마음에 더해서 에놀 호수까지 무난한 산책하는 것 같은 길을 걸으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펠라요가 코바동가 전투에서 소나기 때문에 이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진창길을 한참을 걷고 나서였다. 지금까지 걷기 좋던 길이 호수를 지나 숲길로 접어들면서 질퍽질퍽 진창길로 바뀐 것이다. 비가 온 덕분에 첫날은 룰루랄라였다. 그럼 둘째 날도 룰루랄라 할 뻔했으나, 어제까지 내린 비로 인해 오솔길이 질퍽질퍽해지니, 펠라요가 생각난 것이다. 비로 인해 전투에서 이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역시나 펠라요 군대가 우마이야 이슬람 군대를 처음부터 물리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슬람 군대와 벌인 전투에서 계속 패하면서, 동네 주민들과 군인들을 동굴로 대피시켰고, 그곳에서 성모마리아 동상을 발견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나도 절실하게 기도를 드렸을 수밖에. 목숨이 달렸기에 당연히 이슬람 군대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를 했을 텐데. 소나기를 내리게 해서 그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를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오면서 비가 충분히 변수가 될 수 있음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있던 이곳이 피코스 데 에우로파였다는 걸 새삼 알게 된 건 엉뚱하게도 택시(van)를 타고 숙소인 베가바뇨 대피소로 가면서였다. 한 시간 정도 걸쳐 달린 산길이 정말 꼬불꼬불했기 때문이다. 험난한 이 길을 걸어서 갔으면 얼마나 걸렸을까?
코바동가에서 주어진 시간은 40분 정도였다. 코바동가 박물관 앞에서 다시 모인다는 통지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발길이 급했다. 동굴과 성당을 다 둘러보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우린 찻길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숲에서 튀어나온 형국이라서 판단이 더 어려웠다. 눈앞에 폭포가 보인 그곳에서 일행들이 다 도착한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헤어졌다. 왼편엔 동굴이 오른편 산 중턱에 성당이 보였다. 폭포 위쪽 계단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걸 보니 거기가 신성한 동굴(Santa CVEVA)인 것 같았다. 아래쪽에서 성당으로 어떻게 갈까라는 궁금함은 나중에 동굴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당 쪽으로 연결되었다. 밑에서 봤을 때 작은 예배당만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정작 그 예배당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놨고, 관리자인 듯 한 명이 지켜 서서 사진도 맘대로 찍지 못하게 했다.
산티나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성모마리아 상을 따로 세워 잠시 묵상을 하도록 해놓은 그 공간 주변엔 놀랍게도 무덤들까지 만들어놨다. 펠라요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여동생까지. 더불어 알폰소 1세와 그의 아내의 무덤까지 모셔놓은 것으로 봐서 코바동가가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이해가 되었다. 동굴이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그 동굴이 코바동가 광장까지 갈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작은 예배당도 동굴 안에 있지만, 그곳부터 동굴이 길쭉하게 연결되어 수도원과 광장, 그리소 산타마리아 성당까지 가도록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이름이 Santa CVEVA인 것이다. 시간 내서 CVEVA를 발음해 보시길?
그걸 따라 걷다 보면 수도원과 박물관이 나오는데, 그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거기 코바동가 대성당이 보인다. 알폰소 1세가 코바동가 성모의 기적을 드러내기 위해 수도원과 성당을 건축하였다는 그 성당. 1777년 화재로 인해 전소되자 알폰소 12세가 다시 지었다는 정말 잘생긴 성당. 지금까지 주로 도시에 있던 성당을 주로 보다가 자연과 하나 된 듯한 성당을 보니 더 멋있어 보였다. 성당이 자리한 위치가 예술 같았다. 성당 뒤로 펼쳐지는 뒷산과 서로 깔맞춤을 한 것 같은. 그런 성당 앞에 누가 당당히 서있다. 코바동가 하면 생각해야 하는 듣보잡. 그가 누군지 설이 분분하지만 오늘만큼은 인심을 썼다. 펠라요 장군. 그가 외치는 듯하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