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엔테 데에서 멈추다.

사진 한 장 건진 트래킹.

by 길문

사진 한 장 건졌다. 마지막으로 잠을 잔 대피소 콜라도 제르모소에서 푸엔테 데로 가던 중이었다. 어제 지나온 길을 거꾸로 코랄디나스 절벽 앞에 있는 이정표까지 걸은 후, 그곳부터 페다베호 운하를 오른편으로 끼고 걸었다. 그 운하가 얼마나 장대한지 실감하면서 걷던 중인데, 누가 바위에 걸 터 앉아 있었다. 운하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포르투갈에서 온 여성으로 여행사에서 일한다고 했던가?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건 대피소에서였다. 우리 일행보다 늦게 도착한 한 여성이 개인 사물함 앞에서 들고 온 가방을 정돈하는 중이었다.

콜라도 제르모소 대피소와 어제 간길을 거꾸로 가는 일행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러니 여행지 디폴트 값처럼 항상 묻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걷는 내내 들른 모든 대피소에서 유일하게 피부색이 달랐기에 주목을 받았던 것도 분명 한몫을 했을 것이다. 너 어디서 왔어? 포르투갈. 넌? 사우스 코리아. 정말? 나 그곳에서 7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그래? 지금 정신없으니 있다 시간 내서 차 한잔하자. 나 일본산 호지차 있다. 호지차? 잘 모르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신 호지차에 카페인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날 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 잠을 자지 못했다면 좋았겠지만, 뭔가 섬싱(something)을 바라기엔 둘 다 지쳤을 것이다. 걷느라고 말이다.

어제 이 길을 걸어갔다고? & 가이드 카를로스 뒷모습.

잠시 후 따로 만났을 때 그녀가 한 말은 평범했다. 한국을 방문해서 7개월간 머물렀다. 머무르는 동안 서울뿐만 아니라 설악산과 제주도 한라산도 둘러봤다. 설악산 단풍이 너무 예뻐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중에 한국에 다시 갈 거라서 그때 연락하자. 그런 대화를 마치고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지만,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만남이 계속 이어질 확률은 거의 없던 것 같다. 지난 인연이라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다음 날 다시 본 것이다. 우리 일행 대부분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는 걸 봤을 것이다. 그녀가 누군지 몰랐겠지만. 걷다 보면 보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 그녀는 앉아 있던 것이다.

다시 봐도 페다베호는 광대하다.

광대한 페다베호 운하를 따라 걸으며, 풍경을 계속 찍던 중이어서 자연스럽게 그녀를 카메라 플레임에 넣는 순간 느낌이 왔다. 역시나 나중에 찍은 사진을 보니 이번 트레킹에서 건진 최고의 사진이었다. 더해서 그곳에 앉아 있던 그 누군가는 짐작했던 대로 바로 리타 토잘(Rita Tojal)이었다. 절벽길을 걸을 때 스틱도 없이 사뿐사뿐 잘도 걸어 우리 일행을 지나쳤었다. 사진을 보며 아쉬움을 느낀 건 나도 그녀처럼 바위에 걸 터 앉았더라면 하는, 우리는 가이드가 이끌고 우리들이 그를 따라가는 형국이라 걷는 경로를 이탈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다시 그곳에 간다면...... 이런 가정은 불필요하니 아쉬움을 빨리 접어야겠다.

걷다가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운하를 지나 작은 고개를 넘으니 그곳부터 내려가는 길에 눈이 쌓여 있었다. 급경사도 아니라서 무난히 눈밭을 헤쳐나가는데, 가이드 카를로스가 갑자기 그 길을 걷지 않고 그냥 미끄럼으로 내려간다. 앞에서 그러니 뒤에 있던 나도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내 뒤에 있던 이들도 그렇게 했는데, 그 경사로가 갑자기 작은 썰매장처럼 변했다. 비록 썰매는 없지만, 배낭을 멘 상태에서 그냥 미끄럼을 탄 것이다. 바지가 썰매가 된 것이다. 다들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기야 눈이 우리나라만 오는 것도 아니고 눈이 오는 어디든 어릴 때 썰매를 탔을 테니. 그러는 사이 그녀 리타 토잘은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노닥거리는 우리 일행을 지나쳐갔었다. 그새 우리를 따라잡은 것이다.

푸엔테 데가 저 아래 있다.

푸엔테 데로 내려가는 일은 순탄했다. 정말 무난한 산행이었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던 푸엔테 데가 주변 경치와 하늘에 붕붕 떠다니는 독수리(아마도) 떼를 보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푸엔테 데 입구에 있는 목장에 도착했다. 그곳 푸엔테 데는 스페인 북부를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이 가끔 유튜브나 블로그에 케이블카에 대한 영상을 찍고 남기는 지역 명소이다. 처음엔 우리 일행도 케이블카를 타고 높이 750미터 절벽을 한 번에 슝하고 내려올 줄 알았는데, 카를로스에게 물어보니 그러려면 다른 길로 가야 했다는 것으로 봐서 이동경로가 바뀐 것 같다. 잠시 아쉬움이 남았지만 바로 포기하고 케이블카 정류장 뒤편 카페 겸 전망대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이라 쉽다고?

일찍 도착한 이들은 평소처럼 각자 알아서 음료수 등을 마셨고, 늦게 오는 일행들을 기다리는데 가이드들이 택시 타고 숙소로 갈 사람과 걸어서 갈 사람을 구분했다. 의사를 물어봐서 결정한 건데 일찍 도착한 누구도 택시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늦게 내려오는 이들 대부분이 위즈덤 사이드(wisdom side)라서 그들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가이드 카를로스가 판단을 한 것이다. 걸어서 갈 사람과 택시를 타고 올 사람이 숙소에 비슷한 시각에 도착하도록 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늦게 내려온 이들이 우리가 쉬었던 그 전망대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시간을 맞추려는 깊은 배려였겠지? 그렇게 믿는다!

푸엔데 데 전망대에서 오르는 케이블카를 봤다?

푸엔테 데에서 숙소가 있는 에스피나마(Espinama)까지 걷는 길은 전형적인 산길 겸 시골길이었다. 카를로스가 길을 찾지 못해 헤매기는 했지만 걷는 쪽을 택한 건 정말 잘했다. 걸어 내려오다 보니 마을 한쪽에 산티아고 순례길 표지판도 볼 수 있었는데, 도보 여행자들이 이곳까지 올까 싶지만 표지판은 표지판이라서. 그걸 보니 우리가 서있는 곳이 진짜 스페인 북부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 우리가 마지막으로 머물 숙소 이름에 호스텔이 들어갔지만 시설은 호텔 같았다. 두 명이 한방을 쓰는 형태. 첫날밤을 뜨겁게(?) 같이 보낸 롤란드와 나는 다시 깊은 밤을 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역시나 우린 그날 서로 코도 골지 않고 푹 잠을 잘 잤다는.

걸어오면서 본 양 떼 농장.
여행 중 마지막으로 묵은 숙소. 보고 싶다 친구야!

마지막 만찬은 즐거웠다. 지하층 식당에서 주인집 아들이 내려와 재롱떠는 모습도 보고, 적당히 와인 한 잔을 하며 지난 회포를 풀었으나, 우리 일행들 또한 젠틀맨인지라 2차를 했다. 거나한 2차 말고. 1층 로비 겸 카페로 자리를 옮겨 나눈 즐거운 수다. 지금 그들과 나눈 대화는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피코스 데 에우로파에서 걷던 순간순간 느꼈던 추억과 아쉬움만큼은 아직 가슴에 남아 있다. 나만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 건 아니겠지?

미지막 만찬과 귀여운 주인 아들!

오늘 혹시나 해서 WhatsApp에 들어가 보니 나이가 가장 많으면서 서로 친구인 꺽다리 피트와 뚱뚱한 크리스 형님 두 분이 내년 1월이나 2월쯤 런던에서 가볍게 펍에서 보거나 근교로 하이킹을 가자는 메시지를 남겨놨다.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다들 메리크리스마스라는 안부와 함께. 메리 크리스마스? 그렇구나. 12월인 줄 알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올해 처음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받으니 만감이 머릿속을 휘졌고 다녔다. 올해도 이렇게 가는구나 싶지만 그나마 올 한 해 기억 속에 피코스 데 에우로파가 남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글을 끄적거리다 보니 그들이 보고 싶어진다. 그럼 내년에 런던에나 가볼까? 나도 인사를 그들에게 전해야겠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Feliz Navidad y próspero año nuevo!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