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학교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 날이다. 아침부터 해적 분장을 한다고 새벽부터 일어난 이레. 하루 종일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고 게다가 젤리에 사탕까지 먹어서(!) 엄청 신이 났나보다. 하교 하고도 한참이나 그 업된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저녁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젓가락으로 깡통을 두드리며 신나게 노는 중이다.
자기의 몸통 만 한 커다란 쿠키 통을 젬배 삼아, 특별활동 시간에 배웠던 뜻 모를 아프리카 민요비스무레 한 걸 부른다. 흥이 넘치는 이레의 옆에는...
보육원에 장염이 돌고 있다는 경고를 들은 지 불과 하루 만에, 아마도 며칠의 잠복기를 고스란히 거쳤을 장염 바이러스는 이든을 덮쳤다. 말로 표현 못하는 불편함으로 며칠 째 찡찡대는 이든 옆, 쾡한 눈으로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게다가 금요일 저녁의 피로가 몰려오는 엄마 아빠의 한마디.
“이레야, 그거 시끄러우니까 그만해!”
“밥 먹는 시간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얼른 자리에 앉아”
블라블라 블라블라(이후 생략)
병간호와 주중의 피로에 찌든 엄마 아빠에겐 모든 소리가 소음일 뿐이다. 누군가의 작은 움직임도 신경을 건드린다. 평소 같았으면 한 명이 한마디 하고 말 것을 둘이서 두세 마디를 보탠다. 그리고 분위기를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미사여구도 생략한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그릇에 고개를 떨구고 끝내야 할 하루에만 집중한다.
한참 동안의 적막을 깨는 작은 신음소리.
아무런 변화 없이 굳은 이레의 표정,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모이더니 빵 하고 터진다. 엉엉엉. 서러운 이레, 폭발. 아이의 눈물에 대한 역치가 높은 엄마 빠는 여전히 본척만척한다.
“왜 엄마 아빠는 흑흑흑 내가 하고 싶은 거 흑흑흑 못하게 하고, 뭐 맨날 시켜 엉엉 엉엉 으아아아아 앙”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문 닫고 혼자 숨어버린다. 미안하다 이레야 널 달래줄 힘이 없다 ㅜㅜ 아이고 너무 서럽게 우니 좀 안쓰럽지만 묵묵히 밥이나 먹는 엄마 빠.. 저러다 괜찮아지면 오겠지. 아니면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소리 지르며 오거나.
울음소리가 잦아 드나 싶더니 한참 뒤 꽉 닫은 문 밑으로 슉 들어온 종이 한 장.
그리고 거기 그려진 울고 있는 한 아이의 자화상.
해적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젓가락과 한 손에는 깡통을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눈물 방울이 엄청 큰 걸 보니 많이 짜증 났구먼. 필기체로 멋지게 엄마 아빠와 자신의 이름을 휘갈겼구나. 그 와중에 목걸이와 해골의 디테일이 살아있구나. 울면서 거울보고 그린거니?
귀여워서 큭 하고 웃어버릴 뻔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서러운 딸내미 표정에 웃음참기 챌린지가 되어버렸다. 피곤해서 아무 말도 하기 싫었던 마음이 스르륵 녹는다.
“이레야, 네가 잘못한 건 아니야. 엄마 아빠가 피곤해서 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들렸어 그래서 너한테 기분 나쁘게 말한 거야. 화나면 울어도 되고, 엄마 아빠한테 화내도 돼. 그런데 우리가 니 말을 다 못 들어줄 때도 있어. 그래도 우리는 이레를 가장 사랑해.”
이렇게 엄마 아빠에게 시위하는 나이가 되다니 많이 컸구나.
너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엄마 빠가 공사다망하여 요즘 좀 찌들었다만 너에게 예의를 지키도록 할게.
여전히 우리는 '말하기'의 불평등을 겪고 있지만, '표현하기'의 평등은 이뤄가고 있다. 너만의 언어를 찾을 때까지 너를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