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적의 엄마
머리식힐 일이 필요할 때 가끔 찾아보는 유일한 한국 예능프로그램이 유퀴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하며 사나 늘 궁금한 나의 욕구를 약간 충족시켜주는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 스펙터클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아서 보고나면 피곤하지 않은 것도 좋다. 얼마전 그 프로그램에 가수 이적의 어머니 박혜란 님이 나오셨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믿어주는 역할을 하는 부모'라는 컨셉으로 육아서도 집필하시고 육아 관련된 강연도 많이 하시는 듯하다. 예전 1차 임산부때, 서천석님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육아정보를 얻곤했는데, 거기에서 처음 박혜란이라는 이름을 알게되었다. 아마 그녀의 인기는 아들 삼형제를 나란히 서울대에 보낸 것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의 삶' 보다는 '주체적인 여성의 삶'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진 가르침 때문이라고 느낀다.
그 중 이적님의 인터뷰가 함께 나왔는데, 비오는 날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는 엄마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가져온 우산을 쓰고 하교하는데, 우산이 없었던 자신은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 하지 않고 오히려 어른이나 된 듯 신나서 비를 맞고 집에 왔다는 이야기였다.
2. 나의 엄마
어른이 되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엄마는 아마 이적의 엄마가 말하는 아이를 믿어주고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해 먼저 나서지 않는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워준 괜찮은 엄마였던것 같다.
엄마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나도 학교가 끝나면 자기 엄마가 가져온 우산을 쓰고 하교하는 애들을 바라보는 아이였다. 나도 이적 님과 마찬가지로 엄마가 우산을 가져온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이적처럼 비를 맞으며 어른이 된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 대신 할머니가 오셨기 때문이다.
3. 그의 엄마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는 나에게 망부석같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하교시간, 퇴근시간에 맞춰 아들과 손녀들을 기다리러 정류장까지 나가있는 할머니.
예상된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절부절 걱정하시는 모습.
그리고 우리가 요구하지 않아도 미리 한발 앞서 모든 잔심부름을 하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일꾼같은 모습이었다.
나의 엄마도 박혜란 님처럼 나를 믿어주었지만 혹은 혼자 자라게 잘 방목했지만, 그의 엄마와 함께 사는 나에겐 일탈의 자유는 없었다. 그리고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할머니가 우산을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가 우산을 가져오시면 화가났다. 할머니가 오는게 부끄러웠다. 아버지 없이 귀하게만 자란 막내아들, 나의 아빠를 비툴어진 자존감을 가진 가장으로 만든 그녀의 육아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 하교길에 만나는 비는 엄마의 방목에 대한 원망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2020년 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