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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ul 01. 2018

나는 나에게 친절한 며느리가 아니었다

어른들에게만 친절하려고 하면, 나에게는 불친절해진다.

내 몸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자부심이 있었던 분야는 바로 피부였다. 스물 다섯까지는 세수하고 나와서 딱히 로션이나 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피부가 촉촉했고, 밤새 술을 종류별로 퍼마셔도 피부가 짱짱했다. 여드름도 거의 안 나고, 피부에 자국도 거의 없었다.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피부를 칭찬했다. 그리고 만약 그 치세가 지속되었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건 사라져 버린 과거의 영광이라는 소리다.


약 삼십 년간 평화로웠던 나의 피부 월드에 강력한 여드름이 나타난 건 시댁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였다. 시댁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다. 결혼 첫 해, 두 분의 생신을 맞아 시아버지와 따로 여행을, 시어머니와 따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다녀오기 전부터 무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일단 어머님은 매 주 전화할 때마다 그 때 여행 가는거지? 여행 가는거지? 라고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물어보셨고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그냥 스트레스였다. 도대체 나는 거기에서 어떤 경험들을 하게 될까. 


처음에 여드름이 났을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스트레스를 조금 많이 받았나 보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내 뾰루지들은 길어야 하루 이틀 정도밖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날이 갈수록 내 턱이 울긋불긋해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빨간색으로! 나는 이런 피부 재앙 사태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가지고 녹차물 세수부터 뾰루지에 좋다는 온갖 오일까지 사들이기 시작했다.


어머님을 모시고 한 바닷가에 놀러갔을 때에는 좋은 공기도 마음껏 쐬고, 크게 불편하지도 않고(물론 집에 얼른 가고 싶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출발할 때 '나는 오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가서 그랬는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1차 미션 완료, 이제 좀 여드름이 줄어들겠지? 그건 이미 여드름의 폭정 속에 놓인 나의 피부를 얕잡아보는 처사였다.  


아버님을 모시고 다른 바닷가에 내려갔을 때에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때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치매노인들을 위한 데이케어센터에 실습을 나가고 있었다. 토~일요일 일정이었는데, 나는 실습 일정을 변경하기 어려워서(사실은 이 여행을 1시간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일부러라도 실습을 만들었을 것이다...) 일단 남편이 먼저 아버님을 모시고 바닷가로 내려가고, 내가 늦은 기차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아무튼 밤기차는 즐겁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옆 방에 계셨던 아버님이 갑자기 우리를 호출하셨다. 아버님은 갑자기 침대 시트가 더럽다고, 여기는 이렇게 장사를 하면 안 된다고, 너무 더럽다고 얼른 바꿔달라고 하셨다. 우리 것도 꼭 바꾸라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보기에는 깨끗했고, 그리고 여기는 별 2개 정도 되는 모텔과 호텔 사이 정도의 숙소였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청결과 적당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 그리고 심지어 모든 비용도 다 우리가 내는데! 내 머리가 익숙하게 불만 회로를 돌리는 사이, 아직 센터 실습생 모드를 해제하지 못한 내 입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어머 아버님, 정말 그러네요. 제가 가서 빨리 바꿔올게요."


이건 정말 원헌드레드퍼센트 실습생 모드였다. 처음 실습간 날 센터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른들을 모실 때에는 일단 알겠다고 하세요. 대놓고 거절하면 반응이 더 크게 와요. 일단 알겠다고 하고 들어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여드리다가, 해도 안 된다는 상황을 보여드리면 납득하시기 좀 쉬워하세요."


소리를 쩌렁쩌렁 지르시던 아버님은 놀랍게 이 한 마디로 진정되셨고, 나는 숙소 주인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저희 아버님이 나이가 좀 많으시고.... 로 시작하는 레퍼토리를 읊으며 홍삼 스틱 두 개를 드렸다. 숙소 주인은 노발대발 화가 났다. 아지매요, 내가 여기에서 수십 년간 장사를 했는데 청결만큼은 내 자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바른 사투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느낌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며 일단 아버님이 원하는 대로 시트를 바꿔드리고 상황을 해결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0분인가 뒤에 숙소 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짜 힘드신 양반인데 거기 며느리랑 아들이 참 효부다 효부, 아까 그런 것으로 신경쓰지 마이소. 진짜 내가 감동했다 아이가. 앞으로도 아버님 잘 모시소, 감동이다. 나는 그렇게 못 해요. (다시 말하지만 이게 바른 사투리인지는 모르겠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기억나는 만큼 써보았다.)


이 전화를 받고 나니 왠지 마음이 뿌듯했다. 오빠는 옆에서 자기는 아까 아버지랑 싸울 뻔 했는데 내가 신속하게 샥샥 움직여줘서 정말 대단했다고, 고맙다고 칭찬을 계속 했다. 이런 훈훈한 미담까지 남기고 내 마음도 뿌듯해졌으니 여드름도 사라지겠지?


노놉.


여드름은 그 이후로도 3개월은 더 갔다. 나중에는 여드름 때문에 한약도 먹었다.






여드름의 의미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언젠가였다. 


나는 다람살라에서 열리는 달라이라마의 티칭에 참석했는데, 티칭이 끝나는 날 사진을 보려고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그 다음 날 수업이 하루 더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칭을 들으려면 또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고, 여기 보니 통역도 영어랑 힌디어만 제공된다고 하고... 한국어만 듣기에도 어려운데 영어로 들으면 이해가 될까? 싶어서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연하게 한국어 통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여행자를 위한 티칭이어서 분위기도 더 가볍고, 심지어 사람들은 달라이라마와 사진도 찍었다. 개부럽... 나는 역대급으로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여드름이 나기 전에 몇 가지 증상이 있다. 간지럽고 따끔따끔하고. 화가 난 순간부터 턱이 이상했고 나는 감이 딱 왔다. 아... 멀리 떠나셨던 여드름님들이 다시 돌아오시는구나. 인도의 수돗물과 인도의 위생도 견뎌낸 나지만 화는 못 이겨내는구나.... 그러나 이렇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여드름이 발발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했다. 이 상태로 또 몇 달을 견뎌야 한다니..


그래서 나는 여드름을 두 가지 케이스로 두고 여드름이 최초로 발생했던 여름과는 다른 접근을 해 보기로 했다. 그 때 했던 행동과는 100% 다른 행동을 해 보는 것이다. 그 때를 찬찬히 돌이켜보니, 나는 그 때 정말로 내가 미웠다. 시댁과 여행을 간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힘드니까, 내가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내가 아주 용감하고 싹싹한 며느리여서 시댁과 여행을 앞두고 있어도 화가 나지 않고, 그러면 여드름도 안 나겠지! 나에게 2차 폭탄을 던진 것이다.


1. 나는 시댁이랑 여행가는 게 싫다

2. 나는 시댁이랑 여행가는 것을 싫어하는 나를 싫어한다

3. 나는 시댁이랑 여행가는 것을 싫어해서 여드름이 잔뜩 난 나를 싫어한다


그러니까 나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자기혐오의 놀라운 점은 자기혐오 복제품을 끊임 없이 양산한다는 점이다. 자기혐오A, 자기혐오A+, 자기혐오A++....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아니라 내 친구가 실수로 둘도 없는 기회를 놓쳤다면,
나는 그 친구에게 뭐라고 할까?

모르긴 몰라도, 나는 아마 괜찮다고 달랬을 것이다. 진짜 속상하겠다. 하지만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겠지 그리고 다음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실수 안 할테니까 공부한 거지! 내가 치킨 사줄게. 마음 푸삼. 


나는 나에게 좋은 친구였을까. 아니, 나는 정말이지 호러블한 친구였다. 조금이라도 뭘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어서 욕하고 또 욕했다. 그야말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욕을 하고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알게 되었다. 시댁과 여행을 갈 때 여드름이 났던 이유는, 시댁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 내가 나를 미워하고 욕했던 일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침대에 누워 나에게 퍼킹이라고 욕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달랬다. 괜찮아, 속상하지, 맛있는 거 사줄게! 의식적으로 이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조금씩 괜찮아졌다. 다음 날 거울을 보니 여드름이 많이 나아져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또 괜찮아지고, 또 괜찮아졌다. 


여드름 사건을 통해서 내가 얻은 건, 시댁과 부딪히는 일은 당연히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셀프 인정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내 마음에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많은 것들이 훨씬 더 쉬워졌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도 덜 하게 되고, 화도 덜 난다. 그 전까지 나는 어른들이 꿈꾸던 완벽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은 그런 게 되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걸 깨닫게 되면서 나는 올해 만남을 대폭 축소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더라도, 아무튼 지금은 최대한 축소된 형태로만 뵙고 싶다. 특히 여행은 너무 힘들고, 그냥 잠깐잠깐 외식을 하는 수준에서 뵈는 게 좋겠다고 발표했다. 


나는 목표를 바꿨다. 이제는 내가 시댁에 조금만 잘 해도 이틀 밤낮을 칭찬하는, 셀프칭찬형 호들갑 인간이 되려고 한다. 나의 시댁은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고, 강박장애와 불안장애 그리고 유기불안이 있으시고, 노환이라 귀도 잘 안 들리시고 우리에게 의지하고 싶으시다. 나는 체질적으로 누가 나에게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아직 친구 엄빠같은 시댁 식구들이 그렇다면 어딘가로 숨고 싶겠지. 숨지 않고, 냉정하게 잘라내지 않고, 그래도 노력하다니 정말 대견하다.


이런 말을 기회가 될 때마다, 쉬지 않고 나에게 해주려고 한다. 

꼭, 나의 여드름을 위해서만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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