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리 Feb 04. 2018

파혼 후, 서로를 들여다보다

그리고 불안, 불안, 불안

나는 불안장애가 있다. 때때로 불안은 미래의 많은 수를 예측해서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친구다. 하지만 내 피와 살을 너무 쪽쪽 빨아먹는다. 선생님이 써보라고 한 책을 만들면서 나는 이 수많은 것들이 정말로 일어나면 어쩌지 잔뜩 겁먹고 있었다. 특히 가장 두려운 건 시댁 식구들이 나에게 집착하고 간섭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었다. 예를 들어 내년이면 아흔을 맞이하는 노쇠한 시아버지는 1시간 반 거리에서 혼자 사신다. 경기도에 사시는데 종종 종로에 가신다고 했다. 외로운 노인이 서울에 오게 되면, 내가 읽었던 그 수많은 미즈넷의 한 사연들처럼, 우리 집에 무작정 찾아오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건 아닌가? 그러다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면 나는 폭발할 테고, 오빠도 폭발할 테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어차피 이혼할 꺼면 결혼을 왜 하지? 이 루트에 빠지게 되면 답이 없다.


결혼 2년 차에 접어든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그 때의 나에게 사실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골방에 틀어박혀 수없이 많은 상상 F-12339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나는 보통 무언가를 시작할 때 불안에 휩싸인다. 불안종자 1과 저지름종자 1이 보통은 5:5 정도로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새로운 문 앞에 서면 유독 불안종자 1이 무지막지하게 커진다. 이 불안종자를 잠재우는 방법은,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이다. (이틀 동안 유미의 세포들을 완독했더니 자꾸 상상력이 유미의 세포들화된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불안장애가 있다. 요새는 임신을 계획하는 중인데, 불안 리스트가 스멀스멀 생겨난다.


1. 자연분만을 하면 몸이 더 빨리 회복된다고 하는데, 고통을 일시불로 겪어야 한다고 한다. 과연 나는 고통 중 3위에 속한다는 이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2. 시아버님도 시어머님도 모두 외롭고 나이 든 노인이신지라 아이를 낳으면 매일같이 갑자기 찾아오시지 않을까? 그럼 어쩌지?
3. 출산하고 나면 10kg쯤 찌는 게 정상이라던데, 나는 여기에서 5kg만 더 쪄도 내추럴 본 돼지같은데 (돼지야 미안) 과연 회복할 수 있을까?
4. 아버님도 어머님도 사이가 안 좋으신데 돌잔치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기부로 끝내고 싶은데 다들 왜 돌잔치를 왜 안 하냐고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



물론 리스트는 더 많지만 그만 쓰겠다. 글로만 썼을 뿐인데 아까 보리굴비를 먹고 획득한 에너지의 50%를 빨린 것 같다.


지난 금요일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자꾸만 이런 불안들이 나를 휘저었다. 불안이 몸 속에 가득해지자 짜증이 차올랐다. 평소보다 짜증 게이지가 5배 정도는 더 오른 상태로 일을 하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나를 들들 볶는 건 바로 나구나!




불안은 짜증을 불러오고 짜증은 내 피같은 에너지들을 빨아 먹는다. 그리고 불안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불안이 해결되면 또 다른 불안이 시작되고 그 무한루프는 끝나지 않는다. 기분 좋은 금요일에 이렇게 온갖 스트레스를 싸안고 있어야 하다니. 나는 더 이상 나를 들볶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불안들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단 오늘은 행복하게 살기로 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나는 고난이 생기면 의외의 순간에서 잘 해결해 나가는 타입인 것 같으니까.

라고 생각하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치맥에 꼬치에 맥주를 들이 붓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지배했던 불안은 어느새 작아져서 쓰레기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직 쓰레기통을 비우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비워지겠지.






파혼 직후 오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아직 좀 어렵다. 그 때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있다. 그 때의 오빠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쓸쓸함과 우울함과 무거움을 장착하고 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그런 오빠를 보면서 쌤통이라고도 생각했고 미안하다고도 생각했고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고도 생각했다.


내 입장에서는 나의 마음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는,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을 온전히 가져본다고 좋아했던 오빠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 마음을 내가 정확하게 알게 되면 나를 용서하기 어려워질까봐 나는 그 근처에서 숨만 죽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건 상담 선생님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나를 얌체라고 부르며, 오빠에게 지금의 마음은 어떤지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하셨다. 다른 건 다 기억이 나는데 그 때의 오빠 대답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그 이야기가 꺼내기 두려운 것 같다.


요점만 말하자면 오빠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원했던 것 바로 앞에 당도했는데,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무너져 버린 것 같다고도 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슬프다고 했다. 오빠의 룸메이트 커플은 지지고 볶으면서도 결혼 준비를 착실하게 해나가고 있었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서 더욱 슬퍼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오빠는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꺼내면서 차츰 괜찮아졌다. 표정도 편안해지고 예전처럼 장난도 치고. 그렇다고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결혼은 어떻게 하지?




그 난리를 겪고도 오빠는 나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나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나는 결혼을 하게 된다면 종이 울리듯이 명확한 징표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종은 어디에서도 울리지 않았고 내 불안 리스트들만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로 두 달 쯤 흘렀다. 나는 이 진공상태가 좋아서 계속 머무르고 싶었지만 오빠는 이 상태를 힘겨워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 동안 연락 없이 혼자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결혼에 대해서.

매거진의 이전글 파혼 이후, 회복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