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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토끼 Jul 25. 2024

흰 개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계단은 끝이 없었다. 나선 계단 벽면에는 8이라는 숫자가 써 있었다. 12층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벌써 양 다리가 후들거렸다. 덜덜 떨리는 이 다리로 뛰어서 올라가기에는 아직도 한참 먼 것처럼 보이는 숫자였다. 12란 숫자가 이렇게 멀고 커다란 숫자였던가. 예로부터 완전함과 질서를 뜻하는 숫자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완전함에 도달하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아니, 됐고. 완전은 바라지도 않으니 안전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단거리 달리기만큼은 반 대표로 나갈 정도라서 꽤 자신 있는 종목이었지만 열 살짜리 꼬마의 몸으로 1층부터 8층까지 계단을 뛰어 올라왔던 터라 더 뛰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맥박 뛰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우고 울려퍼졌다. 목구멍에서 쇠맛인지, 피맛인지 자꾸만 올라오는 것 같았다. 폭풍우를 머금고 있는 듯한 계단의 눅눅한 공기가 숨쉬기 벅차게 만들었다. 그래도 도망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어서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오르면서 계단 사이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두 층 정도 아래에 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은 처음과 달리 느렸다. 다시 고개를 숙여 제대로 확인했다. 흰 개 한 마리가 헥헥 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친 모양이었다. 더는 뛰지 않았다. 나는 약간 안도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랐다.



불과 몇 초 전, 나는 1층에 있었다. 12층에 있는 우리 집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흰 개가 밖에서 들어왔다. 주인이 같이 있었는지는 희미하다. 여느 아이들처럼 개를 좋아했던 나는 습관처럼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고 츳츳 혀를 찼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흰 개가 나를 향해 왕! 짖으며 재빠르게 달려온 것은.  



낯선 이를 향한 경고나 사냥 본능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반가워서? 그 진위는 알 길이 없으나 조그맣고 귀엽다고 해도 흰 개가 짖으며 와락 뛰어드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공포였다. 일단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냅다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12층까지 내달리게 된 것이었다.



개는 빠르다. 그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면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이미 여러 번 다른 개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내가 먼저였다. 우리 집 현관문을 부리나케 열고 그대로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현관 밖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이 느껴졌다. 어딘지 지치고 느린 개의 발걸음 소리였다. 그 작은 소리는 계단을 타고 천천히 위층으로 향했다.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이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달리기 때문에 느낀 쿵쾅거림과는 또다른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쿵쾅거리는 온몸의 혈관 소리를 달래며 이제는 들리지 않는 발소리를 상상했다. 계단을 타고 다시 내려가는 발소리를. 하지만 계단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흰 개는 다시 1층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그 뒤로 혹시나 개를 잃어버렸다는 방송이 흘러나올까 봐 평소에는 듣지도 않던 아파트 방송을 귀담아들었다. 하지만 개를 찾는다는, 잃어버렸다는 방송은 들리지 않았다. 학교 가는 길에 일부러 요란스럽게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도 하고, 한밤에는 계단에 층층이 불을 켜며 올랐다. 계단이 품은 것은 의외로 많았다. 가끔 담배 피우는 아저씨나 전단지 붙이는 아르바이트생, 체인에 묶인 자전거들 그리고 울고 있는 연인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 개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다행한 일인 걸까.



수백 개의 작은 단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 똑같은 현관문에 바뀌는 거라고는 비뚤게 붙은 전단지의 각도뿐인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 어쩌면 흰 개는 이 안에서 빙글빙글 떠돌며 고여 있을지도 몰랐다.



십 년 후, 나는 친척 집에서 데려온 어린 흰 개와 함께 살게 되었다. 나의 흰 개와는 종종 산책을 나갔다. 흰 개를 공터에 풀어놓고 함께 달리면서 한 번도 그보다 빠르게 달려본 적은 없다.



캐서린을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부채감에 대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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