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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토끼 Aug 01. 2024

바다까지 걷자

온다 리쿠 <밤의 피크닉>

무모한 일은 여름방학에 자주 일어난다.



돌이켜 보면 늘 그랬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싶으면 늘 여름이었다. 혼자 먹는다면서 30인분의 김말이 튀김을 만들던 날도 그랬고, 우산을 들고서 비를 맞으며 하교하던 날도 그랬다. 



그날도 비슷했다. 



강을 따라 바다까지 걷자. 



누가 먼저 꺼낸 이야기인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중학교 시절 친구인 K와 바다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런 말이 나왔던 것 같다. 애초에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걸으면 바다에 도착한다는 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많은 동네가 그렇듯, 우리 동네 역시 천을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가 지어진 곳이었다. ‘동천’이라고 불리는 그 천은 동네의 산책 코스이기도 했고, 등하굣길에 매일 보는 일상의 배경화면 같은 곳이었다. 그 천을 따라 가면 멀지 않은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바닷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거리였지만, 차를 타고 사십여 분 나가면 바다가 보였다. 가끔 어른들의 차를 얻어 타고 포구에 가거나 가을이면 제철인 대하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리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그저 차로 사십 분 정도니까 세 시간정도 걸으면 바다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을 품고 우리는 걷기로 했다. 발원지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어려울 거라 판단해 각자 집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먼저 내가 출발하면 중간에 좀 더 하류 지점에 있던 K와 만나 끝없이 걷는다. 그리고 바다를 만난다. 그것만이 목표였다.



여름이라 해가 이르게 올랐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지만 캄캄하지 않고 하늘빛은 맑았다. 새벽길을 혼자 걷는다는 게 무섭지 않을까 싶었지만, 밤새고 나서 느끼던 낯익은 서늘한 푸릇함이 남아 있어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K와 약속했던 다리 아래쪽에 다다를 때쯤엔 해가 뜨고 있었다. 강의 물살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보니 금방이었다. 너무 일찍 와버린 탓에 잠시 돌계단에 앉아 K를 기다렸다. 토요일 아침, 이 시간에 K를 만나러 간다는 게 약간 낯설기도 했다. 여름의 뽀얀 새벽 공기가 점점 들뜨는 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하얀 K가 웃으며 다가왔다.



물가는 물 흐르는 소리마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우리는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다가 점점 말수가 줄어들어갔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가 소멸되었다. 물소리와 발걸음 소리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은 제법 잘 어울렸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고 당연히 내비게이션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지도를 챙겨가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물을 따라가는 게 목표였으니까, 물은 길을 알고 있으니까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몇 차례 갈림길이 나왔을 때도 우리는 별 논쟁 없이 적당히 선택해서 걸었다. 애초에 길이 아주 단순한 편이기도 했지만 어떤 길을 걸어도 바다에 다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K가 길을 아주 잘 찾는 친구라는 건 훗날 여행을 함께 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빌딩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K는 덤덤하게 하늘의 별을 보고 방향을 찾았다), 그때는 그저 함께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믿음직했다. 



딱히 다짐이나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쉬지 않고 걸었다. 그렇게 걷는다는 것은 중간 중간 카페나 다른 장소에 들러서 걷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물론 혹 카페에 들를 생각이 있었더라도 카페가 보이지도 않았지만. 



가끔 강이 끊기는 건가 싶을 만큼 좁은 물줄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강물은 끊길 듯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차를 타고 가며 봤던 낯익은 건물을 발견하기도 하고 여기일까? 라는 말이 몇 번을 오갔다.



이윽고 찝찌름하고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에 엉겨 붙는 점성이 느껴지는 바람. 익숙한 냄새였다. 바다가 멀지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산뜻한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여름 햇살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아침의 선선함과 달리 정수리에서 내리쬐는 태양은 참기 힘든 따가움이었다. 



그늘 하나 없는 곳에서 온전히 태양빛을 맞으며 다다른 곳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했던 풍경 속으로 요란한 인기척이 훅, 하고 밀려들어왔다. 아니, 그저 평범한 인기척이었는데 걷는 동안 너무 조용해서였을까.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멀리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 나무 데크 위를 걷는 수십 명의 발소리, 누군가 선글라스를 떨어뜨리는 소리, 풍경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웅성거림…. 그곳은 관광지로도 제법 유명한 갈대밭이었다. 상상 속에서조차 생경했던 갈대밭의 풍경이 생각보다 더 낯설게 눈앞에 펼쳐지자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이 습지를 지나고 나면 바로 바다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 바다는 어땠더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다는 보지 못했다.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을 앞에 두고 땀을 방울방울 흘리면서도 아이스아메리카노도 사 마실 생각을 못한 채 관광지 한복판에 엉거주춤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갈대밭 뒤에는 바다가 있다. 이것은 이 동네에 살고 있던 나와 K가 몇 번이나 확인했던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다였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에 비해 남은 거리는 아주 짧은 거리였다.



우리는 넘실대는 한여름의 푸른 갈대밭을 잠시 바라보다가 걷기를 마치기로 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K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국도의 요철을 그대로 느끼며, 창문으로 꽂아 내리는 햇살에 걸려 덜컹덜컹 거리며 돌아왔다. 



여름방학이니까 무모한 일도 괜찮아. 머리카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의 동선을 느끼며 나는 혼잣말인 듯, K에게 건네는 말인 듯 중얼거렸다.




여름의 한 장면,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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