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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토끼 Jul 19. 2024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알베르 카뮈 <이방인>



횡단보도 건너편에 검은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마다 제 얼굴에 불빛을 환하게 켜고 있지만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퇴근길의 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내뿜는다. 8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는 이 횡단보도는 대기 시간이 길다. 다음 신호로 바뀔 때까지 적어도 음악 한 곡을 들을 시간은 있을 거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가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다. 횡단보도에 설 때마다 낯선 얼굴 하나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을까, 그때 나는 만화책이라는 걸 처음 접했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그랬듯이 나는 만화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지금의 어린이들도 그렇듯, 어린이였던 나는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아서 매일매일 바빴다. 피아노학원에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책가방을 메고 만화책을 읽으며 수백 번은 오갔던 길을 걸었다. 학교 뒤쪽 골목을 빠져나와 아주 작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바로 피아노학원이 있었다. 그 길은 아주 한적해서 만화책을 읽으며 천천히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골목길을 빠져 나와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언제 봐도 신호등이 무용지물처럼 보이는 한가한 횡단보도였지만, 만화책을 한 페이지라도 더 보고 싶었기에 일부러 신호를 지키곤 했다. 보통 때와 다른 점은 횡단보도 건너편에 한 남자가 서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횡단보도에 사람이 서 있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기에 힐긋 보고 다시 만화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만화책을 들고 천천히 걸었다. 



내가 건너편을 의식한 건 ‘기척’이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기이하게 걷고 있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싶었는데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면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만화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조금 긴장하면서 남자와 부딪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남자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고개를 드는 찰나, 그 남자는 내 팔뚝을 잡더니 애원하듯 말했다. 



절대 그러지 마. 그러다 나처럼 돼. 횡단보도 건널 때 그러지 마….



남자는 말꼬리를 흐리며 몇 번이나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남자의 얼굴보다 먼저 시선을 끈 것은 한쪽 팔이었다. 아니, ‘없는’ 한쪽 팔이었다.



큰소리를 지른 것도, 화를 낸 것도 아닌 호소였다. 하지만 어른의 간절함이 어린 내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내가 뭐라고 답했었던가? 죄송하다고 했었는지, 네, 네 라는 대답만 연달아 했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도망쳤다. 잰걸음으로 바삐 자리를 떴지만 아까 내가 있었던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그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푹 숙이고 피아노학원으로 숨었다. 단순히 어른한테 혼났다는 감각이 아니었다. 



당시엔 ‘나이 지긋한 아저씨’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지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쩌면 내 또래나 조금 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횡단보도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볼 때면 그때의 간절함이 떠오르고는 한다. 내가 그 남자가 있던 곳으로 가고, 그 남자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는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될 것을 알면서도, 횡단보도를 끼고 마주하던 시간에 그 남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남자와 내가 공유했던 시간은 고작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이었을 뿐이었는데.



이십여 년이 흐른 뒤에도 난 여전히 만화책을 좋아한다. 피아노학원은 오래 다녔지만 재능이 없어서 취미에 그쳤고, 그동안 횡단보도를 수천 번 건넜다. 그때마다 그날의 간절함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횡단보도만 걸을 뿐이다.



초록불이 켜졌다.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까맣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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