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 <음향과 분노>
처음 만났던 것은 네가 열 살 때. 나는 너보다 연상이었지만 그렇다고 너보다 성숙했던 건 아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서툴렀던 것 같아. 그도 그럴 게 동생인 네가 애써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내 기분이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거든.
그래서일까. 우리의 첫 대화는 누가 들어도 썩 듣기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어. 나조차도 내 목소리가 듣기 거북했을 정도니까. 내게서 이런 소리가 난다는 게 깜짝 놀랄 정도였지. 네게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것 같아서 달갑지 않았어. 굳이 친해질 생각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의 부끄러운 부분을 공유하고 있더라. 어릴 땐 같이 지낸 시간이 많으면 친하다고 믿게 되잖아. 방과 후 활동을 같이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등하굣길도 함께하고 있더라. 이상하지? 멀어진 기억은 선명한데 가까워진 기억은 불분명해.
어른들은 말했지. 꼭 오랫동안 만났다고 해서 상대를 잘 아는 건 아니라고, 상대와 잘 맞는 건 아니라고. 그래도 우리는 등하굣길에 업었다, 업혔다 장난을 치기도 했고 놀이터에 들러 한없이 놀고는 했어. 싸워서 한동안 안 보기도 했지만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만났지. 한밤중에 둘이 떠든다고 이웃 아주머니에게 혼났던 기억도 나. 우리는 천천히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며 많은 대화를 나눴어.
학예회 날, 네가 입고 왔던 까만 옷이 생각나. 분홍, 파랑, 노랑나비들이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원피스였지. 오늘을 위해 준비했다며 자랑하던 너는 나보고도 오늘 유독 반짝거린다며 말해 주었지. 서로에게 하는 칭찬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의식이었어. 무대 위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입장 퇴장 순서는 어떻게 하더라……. 현악부 오십여 명 중 눈에 띄지 않을 귀퉁이자리였지만 어찌나 떨리던지. 휘적휘적 활을 휘젓는 네 모습이 냄비에 눌어붙은 밥알을 떼어내려 주걱질을 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비저 나오는 걸 간신히 참느라 혼났지 뭐야. 평소보다 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무사히 학예회를 마쳤다는 것이 만족스러웠어. 근사한 저녁이었지.
우리는 친했던 거지?
내가 네게 가르쳐준 내 언어들을 기억해. 조율할 때는 라 음을 기본으로 한다, 활과 브릿지는 11자 모양이 되어야 한다, 현을 누를 때는 손끝으로 강하게 눌러야 맑은 음이 나온다,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 말이야.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한 내 언어들은 더 많을 거야. 그때의 난 너에게 어떤 언어를 알려줬을까? 너에게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네가 준 언어들은 남아 있지만 정작 내가 준 것들은 기억에서 흐릿해.
하지만 분명한 건 너는 손가락 힘이 없는 아이었고, 활과 브릿지를 나란히 놓고 연주하지 못해 세모꼴이 되기 일쑤였어.
그래, 재능이 없는 아이. 그게 바로 너였어.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싫어한다고도 말했어. 나를 통해 애증을 배웠다고 했지.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한 시간, 의무적으로 만나는 시간마저 줄어들었어. 왜 알잖아, 살다 보면 가끔 멀어지는 시기도 있다는 걸. 멀어지는 건 잠깐이라고 믿었지만 만남의 빈도가 줄고, 일상을 사느라 안부도 뜸하게 묻고, 언젠가 연락해야지 하면서 오늘을 또 넘겨 버렸지.
어른들이 옳았을까? 우리가 함께한 5년이 무색하게 각자의 내일에서 서로를 빠르게 지웠지. 그렇다고 네가 바이올린을 켰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을 거야. 너와 내가 만났고, 같이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의 네가 되었다는 걸.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그 시간은 존재했다는걸. 하지만 네가 아니면 그 시간을 누가 증명할 수 있을까.
네가 내게 말을 걸 때, 사람들은 그것을 연주한다고 한다지. 다른 말로 바이올린을 켠다고도 하더라.
하지만 나는 네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는 일이라고 생각해. 네가 나를 턱에 괴고, 나는 네 어깨에 기대고 그리고 함께 대화하는 일.
이제 나는 모든 걸 의심하기로 했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나뭇잎이 바람을 휘젓는 거라고, 기차가 달리는 게 아니라 철도가 기차를 당겨오는 거라고, 네가 바이올린을 턱에 괴는 게 아니라 바이올린이 네 어깨에 기대는 거라고.
알고 있어. 지금 너를 만난다 해도 그때의 우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보고 싶은 나의 불청객. 내게 귀를 기울이던 너를 생각해. 나를 듣지 않던(不聽) 너를 생각해. 나는 너를 통해 애정을 배웠고, 미움을 배웠고, 망각을 배웠고 그리움을 배웠어.
어느 날 네가 불쑥 찾아온다면, 어느 날 문을 열고 네가 나를 부른다면, 그때 나는 어떤 소리가 날까.
스쳐지나간 우정은 어디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