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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요 Nov 10. 2021

늦가을에 읽은 '여름의 빌라'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것들에 대하여

드디어 얼굴을 대면하며 만났다. 1년만에 오프라인 모임이 재개되었다. 날 좋은 가을날, 연남동 숲길 근처 카페에서 만나 우리는 <여름의 빌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슨 책이든 좋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내밀하게 관찰한 일기같은 소설을 하게 되어서 더 좋은 선택이었던 것도 같다.

여름의 빌라 어떻게들 읽으셨나요? 전체적인 감상평을 나누어 봅시다.

포 _ 금방 읽긴 했는데, 단편영화나 예술 영화를 본 느낌이 들었다. 극적인 부분이나 임팩트가 없이 끝내는 느낌이라, 이런 건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윤 _ 손톱에 난 거스러미를 보는 감정이었다. 막 되게 아픈 건 아닌데 찝찝하고 신경 쓰이는 그런 느낌. 이 작가가 예민해서 소설가로서는 괜찮겠지만 친구하면 피곤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읽다보니까 매 단편 등장인물만 다르고 비슷한 플롯을 보는 느낌이었다.

영 _ 전체 소설 중 '고요한 사건'이 좋았는데, 이 소설집 전체의 주제가 거기 녹여져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를 묻으러 나가려다 첫눈 오는 걸 보고 멈춘 그 장면이 전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닌가 싶었다.

달 _ 이제껏 우리가 읽은 여러편의 단편집들이 있는데, 그 단편집들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쇼코의 미소> 같은 경우는 상실감, <지극히 내성적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늘함을 표현했다면 <여름의 빌라>는 소심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을 준다. 그런 포인트들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사실 여유를 가지고 읽고 싶었는데, 바빠서 후다닥 읽는 바람에 한바탕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은 _ 단편인줄 모르고 읽다가 첫 소설 끝난 뒤에 아쉬웠다. 그 뒷얘기를 계속 읽고 싶었는데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그 뒷편의 이야기들은 그냥그랬고, 그러다 '흑설탕 캔디'에서 좋았다. 첫 소설과 '흑설탕 캔디'가 가장 좋았다.

옥 _ 나와 공통점이 많아서 읽는데 집중이 안됐다. 다 아는 이야기를 일기장으로 읽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모르는 세계가 나올 때 재밌었다. '흑설탕 캔디' 같은 것. 돌이켜보니 소설 배치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뒤쪽이 훨씬 좋던데 뒤쪽의 소설들을 앞으로 배치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정 _ 영화 <벌새>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다들 좋다는데, 나는 좋은지 잘 모르겠던. 그래서 작가가 82년생이라길래 세대 차이구나 싶었다. 서사화가 덜 되어 있고, 비유법이 너무 과하다. 게다가 나는 첫 두 작품에서 외국 생활이 자연스럽게 나와서 빈정 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흑설탕 캔디'를 좋아했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고, 할머니의 캐릭터도 좋았기 때문이다. 다들 '흑설탕 캔디'를 표제작으로 했으면 좋았겠다 했는데, 일단 '여름의 빌라'보다 '흑설탕 캔디'가 제목으로서는 너무 약하다는 의견이었고, 또 이 작품은 여러 소설가들이 함께 쓴 <나의 할머니에게>라는 소설집으로 먼저 출판됐던 작품이라 표제작으로 정하기는 망설여졌을 거라고 했다. 이 사람들, 책 한권 내더니 편집자가 다 되셨네. ㅎㅎ 뒤의 작가의 말에 보면 김봉곤이 편집했다고 나오는데, 김봉곤 작가의 책과 표지가 비슷한 걸로 봐서 편집자 김봉곤의 취향이 이런 표지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봤다.

이 책 안의 인물 줄 가장 명쾌한 인물은 다미라는 의견도 나왔다. 소문의 주인공이었고, 학교를 그만둬야 했던 문제학생 다미는 그 이후로 잘 살았고 주인공에게 전화했을 때 아버지가 각자 다른 애 둘을 키우고 산다며 호쾌하게 웃는다. 백수린 소설 속에서 보기 드물게 명쾌한 인물이었다.

이 소설들을 읽고 느낀 공통점은 잊고 있었던 과거의 경험이 많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친구와 친구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서먹함,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관계 등등. 그래서 좋았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찝찝하고 불편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학교 다닐 때, 과거 20~30대 때 정말 크고 묵직하게 다가온 고민들이지만 이제는 그 고민에서 벗어난 사람도 있고, 학교 다닐 때 멀쩡하다가 뒤늦게 지금 친구 관계에 문제가 생겨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이 소설에 나온 것처럼 나에게도 인간관계의 각도가 미묘하게 틀어진 경험이 있나요?

달 _ 결혼 청첩장을 주고받을 때 그런 미묘한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축의금을 얼마 내야 하나 같은 것들도 그렇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너는 옛날부터 그랬잖아"라든가 "내가 너 아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좋아한다. 나도 잘 모르는 나를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은 _ 나의 발작버튼을 누르는 단어는 '양아치'다. 그 단어를 너무너무 싫어하는데, 그 단어를 아무렇게 않게 잘 쓰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주의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단어를 썼을 때는 그 사람과 선이 그어진다. 그 말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진 _ 나까지 3명의 친구가 친했다. 그런데 그 둘이 성격이 달라서 내가 중간에서 1의 말을 들어주기도, 2의 말을 들어주기도 해야 해서 되게 힘들었다. 사실 두 사람은 이 관계를 굳이 이어나갈 마음이 없었고, 나와 따로 만나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셋이 같이 만나야 한다고 사이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윤 _ 대학 때부터 친했던 오래된 친구가 있었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토피가 있었고, 친구도 대학원 공부까지 병행하느라 좀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다. 친구가 작업실을 냈다길래 "나 놀러가도 돼?" 했는데 "야, 나 여기 일하는데야."라고 했다. 그 순간 크게 상처받았고, 이후 그 친구와는 거리를 둔다.

옥 _ 나는 현재 단톡방에서 그 일이 진행 중이다. 6명이 함께하던 단톡방에서 한 친구가 다른 친구가 불편하다고 해서 3명만 들어가는 단톡방을 따로 팠다. 그런데 그 친구가 요즘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다. 톡을 보내도 읽씹하고...분명 뭔가 그 친구 감정 상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니 답답해 죽겠다. 그래서 버려진 둘이서 맨날 술퍼마시고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온 내용에 대해 하고 싶은 말 한마디씩 해보도록 해요.

정 _ '고요한 사건'에 나오는, 고양이를 묻어주러 맨발로 나가려다가 창밖으로 눈이 오는 걸 보면서 안에서 문을 열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그 눈 내리는 걸 보는 장면(p104)이 작가로서 백수린의 앞으로의 인생을 요약해주는 한 장면이라고 느꼈다. 나에게도 내 인생을 예감케하는 한 장면이 있다. 고1때 청소년 연맹에서 지리산 등반을 했는데, 험한 곳이 나오면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손을 잡아주곤 했다. 그런데 별로 안 힘든 곳에서도 힘든 척하며 손잡는 커플 꼴 보기 싫어서 나는 매번 남자애들이 손 내밀 때마다 괜찮다며 뿌리치고 올라갔다. 그러다 진짜 험한 곳이 나왔는데, 손을 내밀던 남자애가 내 얼굴을 보더니 "쟤는 안잡아줘도 돼"하고 가버렸다. ㅠㅠ 나는 무거운 부르스타를 매고 눈물 질질 흘리며 정상까지 갔다. 이후 직장생활이고 학교생활이고 혼자서 잘 할 수 있다고 도움 뿌리치고 정작 힘들 때 혼자 질질 짜며 해결하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회원들은 탄식했고, 정을 잘 아는 회원은 "그래서 요즘은 타이밍 진짜 잘 잡잖아"라고 했다.)

은 _ 첫 작품 '시간의 궤적'에서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만큼 용기를 내본 적있는 사람들이니까."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 그런 말을 해준 언니에게 어떻게 그렇게 상처입히고 못된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니 옆의 남자보다 그 언니가 훨씬 좋은 사람이고 니 인생에 도움되는 사람인데, 너 정말 후회할거다 하면서 읽었다.

(여기에 대해서 기혼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그 말을 하기 전부터 주인공은 그 언니를 보는 시점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영 _ '여름의 빌라'에 나오는 지호와 한스의 대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백인남자 입장에서 보는 시각과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지만 지호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불편하기도 하고.

달 _ '고요한 사건'을 비롯해 자신은 중산층인데 가난한 마을에 가서 놀라는 주인공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계동 판자촌에 처음 갔던 때가 떠올랐다. 상계동에서 30년을 살았는데도 상계동 판자촌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종합학원에서 수업듣고 버스 탔다가 졸아서 종점에 내린 적이 있다. 종점에서 집까지 오는데 상계동 판자촌을 지나야했고, 그때 무서우면서도 죄책감 느껴지면서도 정말 여러 감정이 들었다. 이후에 군산 철길마을이나 방콕의 철길마을 갔을 때도, 풍경은 아름답고 사진 찍기 좋은 곳임에는 틀림 없으나 주민들은 가난하고, 철길에서 장사하다 기차 지나가면 막 피해야 되고, 그런 것들이 보기에 불편해서 마음놓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고 죄책감도 느껴졌다. 여기가 관광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싶었고, 한편으로는 나는 이 아무 생각없는 관광객들과는 다른 사람이야 하며 선을 그으려 노력했던 생각도 나고 복잡했다.

진 _ 나도 연민이나 동정심을 느낄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이를테면 전단지를 돌리는 아줌마에 대한 불편함. 받기 싫은데, 이걸 안받으면 저 아줌마 일이 끝나지 않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일이 이런 쓰레기같은 전단지를 만드는 일이니 그것도 불편하다. 생태적으로 그러면 안되는데 싶으면서도 노동적으로는 저 아줌마 일인데 싶고, 불편함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