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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확신 사이에 선 우리에게

영화 <콘클라베>가 던지는 2개의 질문

by 이재상 Question First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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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는 관객에게 답을 하기보다는 질문을 많이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끝나면 휘발되기보다 영화가 던진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영화 <콘클라베>가 그랬습니다. 아니,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함이 상당했습니다.


영화는 교황의 갑작스러운 선종 소식을 듣고 숨 가쁘게 바티칸으로 향하는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비밀회의 콘클라베가 열리고,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어떤 암투와 갈등이 벌어지는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편의 종교영화라기보다는 시대상과 인간상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노출시킨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영화는 저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1. 확신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불신의 벽을 깨고 서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결정적인 두 장면을 중심으로 영화 <콘클라베>에 대한 저의 감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1. 확신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면 1]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까닭은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콘클라베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로렌스 추기경은 추기경 단장으로서 이렇게 연설합니다.


"잠시, 제 마음속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선물이 바로 다양성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에 힘을 주는 것은 바로 다양성, 즉 사람과 견해의 다양성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두려워하게 된 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입니다. 확신은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며 고통 속에서 절규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까닭은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직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함은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믿음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까닭은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이 저에게 훅 들어와서 빠져나가질 않았습니다. 확신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죄라는 점. 그러니 우리는 늘,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 연설은 이 영화의 핵심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 내내, 주인공 로렌스 추기경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전말에 대해, 교황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추기경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 콘클라베의 관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 자신 또한 교황이라는 권력을 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건강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꼭 종교적인 믿음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갈등과 분노도 건강하지 못한 믿음의 탓도 매우 큽니다. 그릇된 알고리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의 근거 없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갈등과 분노와 폭력을 재생산해내며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그것이 진실인지,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의심하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우리를 절망시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에는 늘 의심이 함께 해야 하겠습니다.




2. 불신의 벽을 깨고 서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면 2] "여러분들이 싸워야 할 것은 바로 여기... 우리 각자 가슴 안에 있습니다."


유력 교황 후보자들에 대한 추문과 몰락으로 콘클라베는 혼란을 겪게 되고, 급기야 인근의 차량 폭탄 테러까지 발생하며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이 최고조를 향해 돌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 전쟁과 저 짐승들과 싸울 전쟁을 이끌 지도자'라는 극단적인 발언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은 조용히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 저는 콩고에서, 바그다드에서, 카불에서 전쟁 속에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수없는 죽은 자들과 부상당한 자들을 목도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끔찍한 짓을 저지른 저 미친 자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형제님. 여러분들이 싸워야 할 것은 바로 여기... 우리 각자 가슴 안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증오에 굴복한다면,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하는 대신에 편을 가른다면 말입니다.

저는 이곳에 처음 왔고, 아마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며칠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찮고 속 좁은 인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 로마, 이 선거,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습니다. 그것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전통이 아닙니다. 교회는 과거가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가 앞으로 할 일입니다."



귀를 아프게 하는 갈등의 절정에서, 스크린 위에 그리고 영화를 보는 극장 안에 침묵과 적막함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증오라는 일갈에 숙연해집니다. 미워하고 편 가르기 전에, 내 마음 안에 있는 증오부터 들여다보자는 베니테스 추기경의 생각과 말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진 증오가 사실은 우리 각자가 가슴 안에 머물고 있는 증오에서 시작된 것이니 싸움의 방향을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돌려낼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이 널리 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과거 전통과 관습의 기준으로만 보면 천지가 문제고, 천지가 모순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면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어 보일까요? 베니테스 추기경은 문제가 있고 모순이 있다면 그것을 과거의 전통과 관습에 의존하지 말고 새롭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화는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많습니다. 나와 사회, 나와 직장, 나와 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그렇다면 나는 사회와, 직장과 일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영화 <콘클라베>는 확신과 불신 사이에서 증오와 관용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자운동을 하는 듯했습니다.  최고의 성직자인 추기경들도 그 진자 운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확신과 불신 사이에서, 증오와 관용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질문을 품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충격적인 반전으로 결말을 맺으면서 끝까지 질문합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그렇게 불신과 확신 사이에 선 우리들에게 망치로 때리는 얼얼한 질문들을 선물합니다. 극장에서 빠져나와도 여전히 머릿속에 머물고 빠져나가지 않는 질문들이 영화 <콘클라베>에 있습니다.



ⓒ 이재상 2025


※ 이미지 출처 : 익스트림 무비, Nbc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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