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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상 Nov 19. 2024

한 번 앓고 나니 마음이 맑아졌다

나에게 해열제가 되어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지난 주말을 기해 한강의 소설 3권을 모두 읽었다. <소년이 온다>로 시작해서 <채식주의자>를 거쳐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렀다.


책 세 권에 모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감상문으로도 이 소설들을 온전히 설명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잘 쓴 감상문도 그것은 아마도 나뭇가지 몇 개, 나뭇잎 몇 장일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느껴지는 큰 숲과 같은 감상을 앙상한 한 편의 글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소설을 느끼고 체험하려면 소설을 읽어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 몇 개, 나뭇잎 몇 장,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체험의 결과물 중 일부를 앙상하게 적어 함께 나누고자 한다.





해열제 한 알, 소설책 한 권


지난 일주일 내내 목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금요일 저녁에는 순간 몸에 열까지 올랐다. 전날 운동을 무리해서 그런 걸까, 하루 종일 어깨와 등이 뻐근했는데 이것이 운동으로 인한 근육통인지, 목감기에서 번진 몸살로 인한 통증이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니 여전히 식지 않은 땀으로 등에 잠옷이 축축했다. 뜨거운 물에 타미플루를 녹이고, 진통제 한 알을 챙겨 거실 소파에 앉았다. 약 기운이 온몸에 퍼지고, 늦은 아침을 먹을 때까지 무얼 해야 할까.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으니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차례였다. 망설임 없이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다음 날 아침.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몸살 기운이 남아있어 같은 방식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나니 한결 몸이 개운하다. 일주일 내내 갑갑했던 목 상태도 함께 풀린 느낌이다. 그래, ‘목감기를 달고 다니느니 차라리 확 열을 느끼고 한 번 몸살을 앓고 나는 것이 더 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앓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개운해지는 것이 있다.


뜨겁게 데운 해열제를 조심스럽게 목 뒤로 넘기면, 조금씩 약 기운이 온몸에 퍼짐을 느낀다. 그리고 이내 묵은 땀을 내보내면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랬다.



아프고 먹먹한 마음에 머물렀다

-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마음이 아팠다. 5월의 광주가 처음으로 '느껴지는' 체험을 했으니까. 역사적 사실로,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가슴으로 느껴지는 수준으로 진화했으니까. 그래 이건 진화가 맞다. 가슴으로 느껴야 연대할 수 있으니까. 나는 이제 더 높은 수준의 연대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책에서 느낀 모든 화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예전에 나는 5월의 광주를 알고는 있었지만 함께 느껴보려고 하지는 않았었다. 고통의 크기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 애써 외면했었다. 이제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기억하는 수밖에. 책을 읽는 이 발톱같이 작은 고통과 수고로움으로는 해소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무겁고 먹먹하기만 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질문 속에 머물렀다

- <채식주의자>


이어서 읽은 <채식주의자>에는 온통 질문이 가득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이해할 수 없으면 용납하면 안 되는 걸까? 그 이해와 용납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나? 남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에 인간에게 있는 걸까? 질문해 본 적도 없으면서 왜 우리는 이해했다고 착각할까?


내가 속한 이 좁디좁은 현실 세계에서 머리를 굴리는 일 말고, 완전히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고 경험할 수도 없었던 다른 세계에 들어가 생소한 감각을 느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질문 속에서 머물러보는 체험을 했다. 그건 때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한 번 앓고 나니 마음이 맑아졌다

- <작별하지 않는다>


11월부터 느꼈던 아프고 먹먹한 마음. 고통스럽고 괴로운 마음이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었다. 마치 일주일 내내 달고 다녔던 목감기처럼. 그리고 일요일 아침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읽고 알았다. 그 마음들이 무언가 한 번은 앓고 나야 떨어진다는 것을, 그렇게 한 번은 아프고 나야 해소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 다큐멘터리 영화를 준비하다 사고를 당해 입원한 한 사람, 그리고 그의 부탁으로 무겁게 눈 내리는 제주에 가서 고통을 겪게 되는 한 사람. 그리고 이 두 사람과 연결되는 4.3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한 사람. 세 사람 모두 고통을 이해하려면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소설을 그저 4.3으로만, 몇 개의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가뿐히 지나간 몸살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시기가 우연히 겹치면서 의미 있는 독서 체험을 했다.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한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마치 해열제를 마신 듯 내 나름의 마음을 치유하고 해소했다. 그래 인간이니까, 사랑하니까 괴로운 거야. 작별하지 말고, 다시 사는 거야. 열을 내리고 머리를 맑게 하는 치유의 메시지가 <작별하지 않는다>에 있었다.



©️이재상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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