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저는 성당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독재자에 맞설 성당의 미와 웅장함이 필요합니다.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사랑합니다.
시적인 그 힘이 필요합니다.
표현의 억압에 대항하고, 독재자의 가치 없는 구호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 입니다.
살기 싫은 세상이 또 하나 있습니다.
독립적인 사고를 멸시하고, 멋진 경험들을 죄라고 치부하는 세상
우리의 사랑을 독재자와 암살자에게 베풀라고 하는 세상
터무니없게도 그런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들
그러므로 성서를 그저 옆에서 피하지만 말고, 완전히 멀리해야 합니다
공허하고 울림이 없는 말 뿐입니다.
신은 밤낮으로 우리를 관찰하고,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하지만 비밀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우리의 신이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는 걸까요?
불멸이여야 하는 그 영혼을요.
그러나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요?
자기만이 아는 소망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오늘, 이 달, 올해에 일어날 일이 아무 의미 없다면 얼마나 따분할까요?
의미 있는 일이 존재나 할까요?
영원불멸의 삶이 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생이 없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확실하게 말하 건대, 끝이 없는 영생은 분명 지옥일겁니다
죽음 이야말로 매 순간을 아름답고 두렵게 하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통해서만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왜 그 사실을 모를까요?
왜 적막할 수밖에 없는 영원함을 내세워 우릴 위협하는 걸까요?
성당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빛나는 성당 유리창, 서늘한 적막과 도도한 고요함을 원합니다
말씀의 신성함과 시적인 고결함을 원합니다.
또한 모든 잔혹함에 맞서 대항할 자유도 필요합니다.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택을 강요하진 말아주세요.
깃털처럼 자유롭고 때로는 불확실함에 무거운 우리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 아마데우의 졸업 연설문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삶에 대한 부조리를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통해 읽었다. 잔인하리만큼 우리 불행에 관심이 없는 세상.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사실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만 할까?
세상의 흐름이나 자신의 이념과는 무관하게 주어진 판사의 역할에 충실했던 아마데우의 아버지.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 없어야만 했던 아마데우의 삶. 그러나 아들의 죽음 앞에 그를 자랑스러워 했다고 고백하며, 아마데우의 죽음 일주일 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카톨릭에서 금기시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마데우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의사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리스본의 도살자, 멘데즈를 살리지만 죄책감에 ‘레지스탕스’ 멤버가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살린 멘데즈로 인해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을 모두 살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신념을 모두 버리고 선택한 스테파니아는 아마데우를 떠나고, 그는 자신의 지병인 동맥류로 인해 혁명 당일 급사한다. 다른 듯 비슷한 이 부자의 삶은 신념에 의한 선택인 것일까? 우연에 의한 사건인 것일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가 말하는 ‘우연’을 파스칼 메르시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생의 진정한 감독’이라고 정의한다. 우연은 곧 우리 인생의 무 작위적인 가능성을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고 있는 대단하고 무거운 사건 외에도, 믿기 힘들만큼 사소하고 가벼운 순간들 역시 우리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된다. ‘충성심’이 신앙이고, ‘진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였기에 목숨을 걸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자처한 조지. 그러나 그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여겼던 여자, 사랑 앞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레지스탕스를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질투에 눈 먼 자신을 속이고 하기 싫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며 주앙에게 총을 빌린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안정적인 삶? 무의미한 삶? 충만한 삶?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로, 자신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나를 끊임없이 탐구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이를 동력으로 변화를 상상하고 낯선 익숙함을 만난다. 어쩌면 조지는 아마데우가 선물해준 약국의 불을 밤새 켜 놓고 그를 그리워하며, 스테파니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아마데우와 함께하는 삶을 상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메르시어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 성찰을 했다. 또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그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경험이 아니라 이미 머리 속에 계획해 놓은 것들을 재현하며, 주체적으로 살았다고 착각하는 삶.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상의 표상에 맞춰 자기 확신 속에서 사는 인생은 너무 지루하다고 제언했다. 우리의 자화상이 깨지는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디자이너는 언제나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디자인을 하며, 우연을 최대한 배제하는 기획을 한다. 메르시어가 말하는 진정한 인생의 주인인 ‘우연’을 디자이너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어떠한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 주저하는 것일까? 무엇이 두려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