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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분 소피아 May 07. 2020

엄마의 '치매마당'에 카네이션을 심습니다.

"엄마, 엄마가 내 엄마인 게 영광이야."

세상이 코로나로 덜덜 떨고 집밖도 못나갈 때도 자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새들이 알을 낳고, 바람의 온도를 조금씩 데워 놓는다.

5월이라는 찬란한 달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어김없이 계절은 돌아와 내 앞을 알짱거린다.

갇혀있던(?) 사람들은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며 감탄을 하지만 난 이 5월이 두렵다.

위생개념 없는 식당의 꾀죄죄한 행주처럼 이미 마음은 빛을 잃고 어디에 마음을 기대어 놓을지 몰라 갈피를 못잡고 있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서울행 버스를 탔다.

치매가 조금 있으신데다가 뇌경색이 와서 갑자기 입원하셨다는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

엄마에게 대못박고 귀농한 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엄마는 천안의 종갓집 맏며느리셨다.

내 어린 기억에도 머슴아저씨들이 두 분 계셨던 것으로 보아 대농에다 땅이 좀 있는 편이었다.

그 당시는 도시건 시골이건 때꺼리도 없어 힘든 시절이었고, 우리집은 구리스를 바른 것처럼 윤택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엄마의 머리는 다른 촉이 발달하여 '시골에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국 다섯이나 되는 딸들을 시골사람이랑 결혼시킬 게 뻔하다'고 판단하셨다. 

밤마다 아버지 귀에 세뇌교육을 시키셨던 엄마는 드디어 땅이며 집이며 모두 그대로 두고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옮겨 앉으셨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윤택한 생활을 하던 시골생활과는 달리 서울생활은 힘드셨지만 김종삼 시인 말마따나 <엄마는 죽지 않는 계단>이었다.

나는 박완서 선생님의 어린시절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시골의 유년은 그 시절 다른 아이들이 보자기로 도시락을 싸서 가슴팍을 가로질러 매고 다닐 때, 난 란도셀 가죽가방을 매고 다닐 정도로 부족한 게 없었다는 점, 사랑을 흘러 넘치도록 받았다는 점 등도 똑같다. 

하다못해 박완서 선생님은 현저동이고, 난 언덕 하나 넘어 홍제동에 산 것까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종갓집 맏며느리는 시골에 시부모님만 남겨두고 서울로 옮겨 앉을 수 없어 둘째 딸은 시골에 두고 오셨다.

그렇게 서울에서 자리를 잡는 데 생활력이 강한 엄마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화초를 가꾸시고, 글을 쓰시고, 영화보러 다니시는 등 사람만 좋았지 생활력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비해 엄마는 어떻게든 새끼들 교육을 많이 시켜 시집을 빵빵하게 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생활 전선에 자주 나서셨다.

엄마는 "자식에게 돈을 남겨주면 사기도 당하고, 까먹을 수 있지만, 머리에 남겨주는 것은 좀먹을 리도 없고, 누가 빼앗아갈 리도 없고, 홀라당 말아먹을 일도 없다"는 게 그 분의 신앙이었다. 

그랬기에 막내인 난 대학원을 나오고도 유학을 가기 위해 사전답사까지 다녀왔는데 것다 대고 아버지는 "그만하면 되었지 무슨 유학이냐"며 바람을 넣었다는 이유로 엄마 타박을 하셨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대학원까지 나와 한국생산성본부 선임연구원으로 잘 다니던 딸이 어느날,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운다며 귀농이라는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를 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무너지셨을까.

다행히 아버지는 이런 거지같은 꼴을 안보려고 하셨는지 내가 귀농하기 직전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딸이 내뱉는 귀농이라는 단어에 아예 일언반구도 않으셨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렇게 손에 흙 안묻히고 서울에서 머리에 먹물 많이 넣어주어 떵떵거리며 살게 하고 싶으셨던 엄마를 뒤로 하고 산골 오두막으로 귀농했다.

지금 엄마를 보러 가는 길....

중환자실로 가는 길은 험했다.

온도체크도 하고, 소독도 하고, 정해진 시간 달랑 20분을 온전히 누리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중환자실 문이 벌어지길 기다렸다.

중환자실에 들어서서도 소독하고, 비닐 옷 입고, 마스크 쓰고 몸통의 반을 돌리니 바로 엄마가 보였다.

"엄마"하고 달려드는 딸을 몰라보셨고, 마스크를 벗자 팔을 허공에 휘저으시며 반갑다고 우셨다.

엄마가 나를 알아보는 시간은 번개처럼 지나가고 엄마는 다시 당신의 세계인 '치매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를 몰라보셨고 나는 엄마라는 말만 수도 없이 불렀고, 엄마는 알아듣지도 못할 엄마의 말씀을 하셨다. 

아까운 20분의 면회시간은 그렇게 각자의 소리를 하며 안타까워 했다.


난 머리 털나고 엄마가 누구와 싸우는 것을 어려서부터 본 적이 없었고, 아무리 사기를 당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것쥬"라는 말로 지나치셨다.

여북하면 학창시절 내 소원이 우리 엄마도 쌈닭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을까.


알량한 면회시간은 인정머리 없이 흘러갔고, 간호사는 면회시간이 끝났으니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가겠다고 해도 엄마는 아직 치매의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마중도 못하셨다.

"아이고, 막내야 그 먼 데서 어떻게 왔니?" 하며 안아주셨을 엄마인데 그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혹시 엄마가 다시 나를 알아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을 있는대로 엄마쪽으로 꺾고 퇴장했지만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다.

중환자실 문이 쌩하니 닫히고 언니들이 시골에서 올라온 나를 본다며 모두 모여 있었다.

이 정도로 심해지시지 않았는데 충격에 휩싸인 나는 그 자리에 북박이처럼 서 있었다.


이제 다시 버스를 타고 울진으로 돌아오는 길은 오라지게 더 길었다.

서울가기 전, 엄마를 생각하며 주문한 카네이션과 꽃들이 시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네이션을 보자 버스에서 소리죽여 울던 게 서글퍼 울었고, 엄마가 나를 몰라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엉엉 울었다.


다음 날,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막내야, 간호사님 말이 네가 울진으로 가고 엄마가 "먼 데서 왔는데, 먼 데서 왔는데..."하시며 밤새 울으셨데."

내가 울진으로 가고 엄마는 치매의 방에서 나오셨는데 내가 다녀간 것을 깨달으신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엄마를 따라 밤새 울었다.


<눈이 부시게>의 명대사처럼 엄마도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엄마였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새엄마 밑에서 자란 엄마는 늘 '너는 친엄마라서 얼마나 좋으니.'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려서는 그 말 뜻을 잘 모르고 만트라처럼 들었다.

엄마는 최근들어 "빨리 내 엄마를 만나러 가면 좋겠구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엄마하고 발음하면 이 단어는 바로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엄~~하며 입안 메아리를 만들고 입밖으로 나온다.

엄마라는 존재는 메아리와 같아서 늘 내 주위를 신비한 힘으로 둘러쳐 주는 사람이고, 나쁜 것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사람이고, 닭이 횃대에 앉아 편안한 잠을 자는 것처럼 자식에게 늘 푸근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이다. 

나는 카네이션을 화분에 심었다.

흙을 몇 번이나 다독여주고, 물을 자꾸자꾸 주었다.

햇살이 눈부신 날, 엄마가 시골에서 쓰던 절구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

엄마의 치매의 마당에 카네이션을 심었어.

엄마가 물을 주고 꽃을 가꾸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엄마가 그토록 평생 그리워한 엄마를 만나러 가는 날, 꺾어갔으면 해. 

그리고 엄마, 피천득 선생님 말씀처럼 엄마가 내 엄마인 것이 영광이었어. "


<농사짓는 작가>라는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RonihprZA8c&t=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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