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6월 2일 ~ 8일
“엄마가 나 발표할 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포도가 유치원에서 환경 대통령 후보로 나섰단다. 공약은? 빗자루를 타고 날 수 없기에 매일 청소기를 돌리겠다고 말했다나 뭐라나. 마녀 배달부 키키와 엄마의 영향을 받은 공약이다. 나는 느타리버섯을 달달 볶고 있었다.
“그치, 엄마도 너 발표하는 거 보고 싶었어. 그런데 엄마는 안 봐도 다 알아. 우리 포도는 분명 잘했을 거야.”
“엄마.”
포도가 뜸을 들였다. 엄마는 바쁘니깐 나중에 말하라고 하려다가
“응?”
다정하게 대답해 줬더니,
“엄마가 잘했을 거라고 믿어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 사랑해.”
당장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포도야아아아아아아.”
나는, 감동적이다,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렇게 말해줘서 엄마가 더 고맙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다, 믿어줘서 고맙다는 말은 엄마도 못 했던 말인데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등등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탄사를 해대며 포도를 꽉 안아줬다. 얘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걸까.
나는 여태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넌 잘했을 거야.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들었더라도 이미 내 마음이 틀려먹어서, 믿어줘서 고마워, 같은 말은 상상조차 못 했다. ‘내가 잘했을 거라고 믿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스스로 자신이 잘했다고 믿는 사람이겠지.
사실 나는 틀려먹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뭐 해, 책을 읽으면 뭐 해, 글을 쓰면 뭐 해, 요가를 하면 뭐 해,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돌리면 뭐 해, 부동산투자 단톡방 벽타기를 하면 뭐 해, 이게 천지 무슨 소용이냐고.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누군가 오늘 내게
“너 잘 살고 있어.”
말했다면 나는 분명
“야. 잘 살기는 무슨. 개뿔이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포도는 환경 대통령이 되었다. 좋겠네. 축하해. 나는 오늘 무엇이 되었을까. 매콤한 김치어묵우동 한 대야를 먹어 치운 돼지가 되었다. 아이고, 좋아라. 뺄 살이 생겨서 축하해. 빼면 돼지. 뺀다고 뭐라도 될까.
<대차게생각해봄>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출구 조사 결과가 나왔다. 어재명의 승리였다.
“이제 서울 집값은 완전 급속도로 날아갈 거야.”
남편이 말했다.
“자기야, 서울 집값은 원래 날아가고 있었어. 대선 결과랑 상관없다니깐.”
1월 말부터 이미 서울 불장은 시작되었다. 어디서 뒷북이야.
요즘 서울 ○○대학교 주변 1.5룸 월세가 우리 고장 34평 대장 아파트 월세와 똑같다. 포도가 대학생이 되면 1.5룸에서 살 수 있을까. 내가 그 돈을 줄 수 있을까. 1.5룸은 무슨, 어림도 없다. 그러면 포도는 고시원에서 살아야 할까. 허름하더라도 아파트에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허황한 꿈일까.
코로나 시절,
“요즘 눈먼 돈이 얼마나 많은데. 갖다 쓰는 놈이 임자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지만 내 눈이 멀어 돈이 안 보였을 때, ○○○창업이 유행이었다. ○○○창업은 무피 투자라고 했다. 창업 후 몇 개월만 지나면 각종 정부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결국은 플피 투자라고도 했다. 또 그런 창업이 유행하려나.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르고, 부동산에 창업까지 아무것도 몰라서, 잘 모르겠다. 그저 우리 포도가 인서울 하게 된다면 아파트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서울에 똘 한 채를 사고 싶다. 그게 내 목표다.
<대차게해봄>
대선 맞이
목표 재점검
나는 일평생 작심삼일을 했다. 작심을 아예 안 하면 얼마나 좋을까. 작심을 안 하면 삼일을 안 해도 이렇게 괴롭지 않을 텐데. 늘 작심하고 늘 삼일만 하다가 또 삼일을 쉬다가, 삼일은 무슨, 육일, 구일, 십이일, 오랫동안 쉬다가, 쉼은 무슨,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면서 괴로워하다가, 또 작심하고 또 겨우 삼일만 한다. 욕심이 없으면 작심을 안 할 텐데. 욕심이 뭐그치 많아서 작심이 생활이다.
한 달이나 밀린 가계부를 드디어 작성했다. 책상에 쌓인 영수증을 싹 다 버렸더니 속이 얼마나 시원한지. 밀린 식단 일기는 쓸 수 없어서, 어제와 오늘 내용만 기록했다. 엥? 삼시세끼 식후에 수박을 먹었다고요? 수박은 수분이 많아 살이 안 찐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팔뚝이 소시지처럼 부풀어 오른 건 저 수박 때문이었다. 영어 공부는 친구와 일주일에 여섯 번 이상 못할 경우 곗돈 통장에 벌금 내는 시스템을 구축해 뒀다.
“엄마, 요즘 왜 영어 안 해?”
포도의 말에 뜨끔, 벌금을 정산했다. 만 삼천 원이나 되었다.
또 작심한다. 매일 꼬박꼬박 가계부 써야지. 매일 꼬박꼬박 식단 일기 써야지. 매일 꼬박꼬박 영어 스피킹 십오 분 해야지.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매일이다.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작심하면 매일 꼬박꼬박할 수 있으리라.
밀린 걸 처리하고 새롭게 작심하니 마음이 가볍다.
새로운 마음으로 작심하는 일은 나의 특기다, 특기!
<대차게해봄>
작심삼일
무한반복
심규선의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다. 계속 듣고 싶은 마음에 끝없이 들을 수 있는 핑곗거리를 찾았다. 내 팔자가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팔자는 아니니깐. 찾았다, 요놈, 정리다. 주방과 식탁 위를 오랜만에 정리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했다.
내 귀에 부동산, 주식, 건강 이야기 대신 음악이 들리니 평화로워졌다. 행복과 불행은 다 내 마음속에 있다더니, 나의 행과 불행은 내 귀에 있었을까.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행과 불행이 결정되었다. 무엇을 들을지 선택하는 일은 나의 몫, 기꺼이 평화로운 소리를 선택하겠다.
언젠가는 부동산, 주식, 건강 이야기가 나를 기쁘게 해 줄 것이다. 그날을 희망하면서 '이 밤의 끝을 잡고(라떼에 유행했던 노래 제목)' 심규선을 듣는다. 방 정리를 해야겠다.
<대차게해봄>
공간을 정리할수록
마음이 정리되더라
요즘은 늘 그저 그렇다. 불만족스럽다. 왜일까.
새벽에 일어나 고요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이른 새벽으로는 어림없다. 완벽한 꼭두새벽에 2시간 이상 진득하게 몰입해야 비로소 풀린다. 그래야 내 안에 억세게 꼬여 있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진다.
몸이 찌뿌둥하다. 2020년 출산 이후 최악의 컨디션이다. 5월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요가원에 겨우 두 번 나갔다. 오늘은 집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절반만 해서 사바아사나의 기쁨이 전혀 없었다. 그 기쁨은 아사나 도중 고통의 끝에서 정신이 살짝 나갔다 들어와야만 찾아온다. 고통의 끝은 이 주일 정도 매일 수련한 후 몸이 충분히 풀려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마음은 왜 꼬였을까. 모르겠다고 쓰지만 사실은 안다. 지금보다 훨씬 좁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 가기 싫어서다. 추척 60분에서 봤던 ‘은둔중년’처럼 계속 지망생 신분으로 살까 봐 두렵다. 내가 내 손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인데 답답하다. 신물 난다. 맛이 갔다. 질렸다.
질렸지만 다시 좋아해 보자. 억지로 감사한 마음을 내어본다. 건강하게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일용할 양식, 일용하기는 무슨, 차고 넘치는 양식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상의 언어로 다 못 담을 만큼 사랑스러운 포도가 제 곁에 존재함에 감사합니다. 포도 얘기만 하고 남편 얘기가 빠지면 서운하니, 부지런하고 성실한 남편 덕분에 전업주부로 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래, 전업주부로 살 수 있는 거 자체가 복이다. 큰 복이다. 고맙습니다.
몸과 마음이 풀렸으면 좋겠다.
내일은 조금이라도 더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대차게감사기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도 친구네는 연휴에 풀빌라에 간다더라. 풀빌라는 1박에 얼마일까. 어차피 못 갈 테니 몰라도 된다. 풀빌라보다 실내 수영장이 훨씬 낫지. 계산할 필요도 없어.
“엄마, 오늘 나 세 가지나 잘했어. 잠수, 자유영, 배영.”
포도는 얼굴을 아주 조금 물에 담갔고 내가 떠받친 채로 자유영 흉내를 냈으며 배영도 시도했다. 폼만 잡았다. 그래도 수영장에 갈 때마다 재주가 하나씩 늘고 있다. 입장료 8,750원으로 포도는 실컷 수영했고, 남편과 나는 번갈아 가면서 수영했다. 거저다, 거저.
수영장에서 나와 올해 첫 외식을 했다. 우리 세 식구만 단란하게 외식하는 건 맥도날드 이후 2년 반 만이었다.
“자기야, 우리 처음으로 갈비탕 사 먹는 거야.”
포도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돼지국밥을 사 먹은 적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갈비탕은, 무려 1인분에 15,000원이나 하는 갈비탕은 결혼 14년 만에 처음이다.
“우와. 계속 들어가네.”
포도는 고기를 씹으면서 국물을 들이켜고 밥을 떠넣었다. 오물오물 저 탐스러운 입 좀 보소. 쉬지 않고 먹었다.
“자기야, 함소아 한약보다 수영장이 낫네.”
밥 잘 먹게 하려고 짓는 함소아 보약은 한 달 약값이 최소 376,500원이다. 비염 약까지 더하면 500,000원이 훌쩍 넘는다. 그 약 덕분에 밥을 더 잘 먹었고, 더 건강하게 컸다고 믿지만, 믿기는 믿지만, 비싼 건 사실이다. 함소아 보약보다 포도의 밥맛을 더 좋게 하는 건 바로 수영이다. 포도는 수영장만 갔다 오면 밥을 세 배는 더 먹는다. 그리고 단잠을 잔다. 먹고 푹 자면? 백방 잘 큰다! 암요, 암요. 매일 한 끼를 이렇게 먹어준다면 유치원에서 제일 작은 어린이 타이틀을 반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외식을 안 했더라면 아침부터 유부초밥이든 새우볶음밥이든 바리바리 도시락을 쌌겠지. 돌아와 씻을 그릇이 없으니 얼마나 편한지. 좋다. 포도가 잘 먹었고 내가 편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 아무리 생각해도 풀빌라보다 실내수영장에 갈비탕이 훨씬 더 합리적인 소비다. 이렇게 조목조목 따져야 안다는 게 문제지만.
사실은 나도 풀빌라에 정말 가고 싶다.
<대차게소환해봄 : 외식의 기억>
트레이더스에서 장을 볼 때마다
닭반마리칼국수랑 불고기베이크를 사 먹었음
바다에 가면 속이 좀 시원해질까. 습도가 95%였던 오늘, 만리포 해수욕장에 갔더니 해무가 가득했다. 온통 뿌예져 있었다. 물안개가 손에 잡히는 착각마저 들었다. 바닷물이 들어올수록 답답함이 나를 덮쳤고, 물이 빠질수록 머리가 아팠다.
오후 다섯 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늘밭에 마늘 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나가는 트럭마다 마늘이 태산처럼 실려 있었고, 창고에는 마늘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풍경을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흙냄새와 땀 냄새, 활기찬 생명력이 보였다. 생이 저기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녁밥을 조금만 먹고 일찍 자야지. 내일은 꼭두새벽부터 설쳐야지. 그래야 나는 하루를 잘 살 수 있다. 하루, 딱 하루만 잘 살면 된다. 인생,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대차게해봄>
내일 딱 하루만 잘 살기 위해
오늘을 잘 정리하기
+
해무가 가득해서 멀리는 안 보였지만,
바로 앞은 잘 보였다.
멀리 볼 필요가 있을까.
바로 앞만 보고 달려도,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