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물었을 때, 나는.
사춘기 터널을 막 지나고 있는 조카 주원이 물었다. 이모와 둘이 하는 짧은 여행길이었다.
“이모는 왜 살아요?”
“글쎄, 태어났으니까”
자동반사적이었다. 종교적이라거나 철학적이어야 했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들먹었어야 했나 하는 짧은 후회가 스쳐갈 때쯤, 소년이 말했다.
"다들 누굴 위해서 살던데, 적어도 이모는 누구를 위해서 살진 않네요”
질풍노도기의 폭풍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그가 다시 물었다
“이모, 인생은 고통스러운 일이 더 많지 않나요?”
열다섯이 하기엔 이른 질문이었다.
“그렇긴 하지”
소년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살아요?”
이 질문을 처음 들은 것은 내가 그의 나이 즈음이었다. 중학교 도덕 시간이었다. 수업 시작이었다.
"6번, 너는 왜 사니?”
선생님이 일으켜 세우셨다. 재미있는 입담으로 인기 많던 선생님이셨다. 농인 줄만 알고 웃었다. 국어책에 있는 대로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대답할 참이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선생님은 왜 웃냐고 정색하셨지만. 내가 뭘 잘못했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표정은 구겨졌고, 아이들은 긴장했다.
“만일 이런 질문을 갑자기 한다면 너무 당황스럽겠지?"
선생님이 웃자, 그제야 아이들도 웃었다. 수업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질문이었다며 미안하다 했다.
그 수업시간에 무엇을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바보같이 웃었던 부끄러움만 잊지 않고 있다. 왜 사냐는 질문은 그 후 들어본 적 없다. 나조차 나에게 묻지 않았다. 삼십 년이 지나 이 아이가 묻는다. 대답해야 한다.
“고통이긴 하지. 인생이 5퍼센트의 행복을 위한 95퍼센트의 고통일 수 있지만, 사람은 그 5퍼센트 때문에 살 수 있어. 그리고 아직은 질문을 던지는 시기이잖아. 대답을 찾을 수 있잖아. 그 답은 없을 수도, 여러 개일 수도 있어. "
소년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삶의 반을 지나왔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채 얼굴이 빨개진 채 중학교 교실에 서 있는 나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했다.
“그렇긴 하죠”
변성기를 지나는 소년도 나즈막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사소: 사람들을 왜 남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걸까요?
스텔라: 글쎄, 사는 것 앞에도 '왜'가 꼭 붙어야 할까?
*80년대 중학교 국어책에는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라는 시가 실려 있었어요. 시인의 족적 때문에 여직 실려 있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