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타임 Apr 06. 2021

"아빠가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취향 존중과 가족 관계 사이에서 줄타기

남편은 새로운 문화에 대체로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편이라 낯선 여행지의 새로운 음식과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처음 겪는 상황도 대체로 얼어붙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치마와 빨강 구두를 신고 있는 것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아이가 치마를 입는 걸 남편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왜 이래 촌스럽게,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가 싫어하는 걸 잘 알고 그걸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 산다. 아이 양육 방법은 대체로 일치했지만, 당연히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을 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육아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았다.     


아이의 취향도 존중해주고 부부 사이도 지키는 일은
남편이 일찍 들어오지 않는 날만 입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일주일 중 남편이 야근하는 날과 하지 않는 날이 일정해서 우리는 순조롭게 평화를 지킬 수 있었지만, 아이는 아빠가 일찍 오지 않는 날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늘 화요일 맞죠? 맞죠?” 하면서 여러 번 확인하고 나서야 원피스와 빨강 구두를 입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만 입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평소 아이는 잘 놀아주는 아빠를 무척이나 따랐고, 저녁 시간이면 아빠가 일찍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치마를 입기 시작한 뒤로 아빠를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루는 “아빠가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고,
아빠가 와도 반가워하지 않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불편해할 남편을 위해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에만 치마를 입어도 된다고 했지만, 고육지책이었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와 아빠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었다. 자칫하면 오히려 아이에게 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에게 아이의 취향보다 더 중요한 건 가족 간의 신뢰와 원만한 관계다. 나는 아이에게 “가을이 돼서 더 이상 짧은 반팔 옷을 입기 어려우니 내년에 입자”고 설득했다. 약간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다행히 아이는 쉽게 순응했다. 사실 너무 쉽게 순응해서 속으로 좀 놀랐다. 그리고 이렇게 일단락되는 것 같아서 안도했고 아이에게 고마워했다. 


한편으로는 속이 상했다. 부모가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게 아이에게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아이와 아빠의 사이가 어색해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겠다고, 시간을 더 갖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이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 게
꼭 최선은 아니었다. 

아이가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무조건 허락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프랑스 엄마들은 아이가 입고 싶어 해도 공주 옷을 아무 때나 입도록 허락하지 않고 생일이라든지 특별한 날에만 입을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왜 아이가 좋아하는 걸 입지 못하게 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어릴 때부터 사회가 만들어놓은 젠더 규범에 갇히는 걸 막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원피스를 입지 않게 되자 구두도 자연스럽게 정리함으로 들어갔다. 구두는 쉽게 눈에 띄는 곳에 두었지만 신겠다고 하지 않았다. 특정 장난감에 꽂혔다가 다시 관심이 옮겨가는 것처럼 원피스와 구두도 아이에게는 장난감의 일종이었던 게 아닐까. 구두나 원피스를 남편 눈에 띄지 않게 숨기지도 않았다. 입은 모습을 보는 건 불편할지라도 원피스와 구두에 노출돼 무뎌지는 건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았다.


이전 03화 "치마 입어도 괜찮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