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옷은 남자보다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 바지, 치마, 원피스, 뷔스티에, 멜빵, 후드티, 하이힐, 펌프스, 운동화, 가죽, 벨벳 등 거의 모든 소재와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취향에 맞게 입을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훨씬 제한적이다. 대부분 티셔츠와 바지, 운동화이고, 가끔 셔츠나 펌프스를 신기도 하지만 자주 입지는 않는다. 나는 우리 아이가 남자라는 성별을 가졌단 이유만으로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걸 몹시 억울해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치마가 입고 싶다고 했을 때 사실 약간 흥분했다. 나도 드디어 예쁜 옷을 입힐 수 있다니!
얼마나 입을지도 모르는데 바로 사기는 아까우니 우선 키즈카페의 공주 원피스 코너에서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혀줬다. 아이는 신이 나서 사진 찍는 나를 향해 꽃받침하고 예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짧은 머리와 드레스가 썩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예쁘다고 최대한 리액션을 해주었다.
그다음에는 딸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동생에게 작아져서 입지 않는 조카들 원피스가 있는지 물어봤다. 동생은 별말 없이 친정에 몇 개 갖다 놓겠다고 했다. 그 뒤에 친정에 가서 원피스를 아이에게 입혀줬고, 낡아서 늘어난 옷이었는데도 아이는 뛸 듯이 기뻐했고 뱅그르르 돌면서 치마를 만끽했다. 늘어난 어깨끈을 대충 동여맨 옷을 입고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나은 옷을 입히고자 당근 마켓을 뒤졌다. 다행히 5천 원 정도로도 깨끗하고 예쁜 원피스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레이스가 둘러져 있고 비즈로 영문자가 수놓아진 연두색 치마를 사줬더니 얼마나 기뻐하던지 지금도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치마도 사줬으니 전부터 신고 싶어 했던 보석이 달린 구두도 사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한참 당근마켓에 빠져서 이것저것 사들이던 때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빨간색 구두를 아이와 함께 골랐고 집안에서만 얌전히 신기로 합의한 후 아이 발에 구두를 신겨줬다.
치마와 구두를 신고 기뻐하는 아이에게 “네가 원한다면 유치원에 입고 가거나 밖에 입고 나가도 된다”라고 했지만 아이는 밖에서는 입지 않겠다고 했다.
내 말은 진심이었지만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아이가 밖에서는 입지 않겠다고 했을 때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이도 일반적이지 않은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치마를 입고
평소 자신을 여자 같다고 놀렸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인도나 인도네시아, 스코틀랜드에서는 남자들도 치마를 입는다고, 치마는 여자들만 입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치마를 입는 남자를 본 적이 없어서인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