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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강 Aug 27. 2020

학교 옆 할머니네 꽃씨

할머니네 석죽 패랭이는 올해도 예뻤다

돌돌 말아진 작은 편지봉투를 노란 고무줄로 튕긴 하얀 뭉치가 교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게 뭘까·' 엄지와 검지로 누르며 비벼보니 작은 씨앗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반대쪽으로 돌려보니 편지 봉투에는 서투르고 투박한 글씨로 이렇게 써져 있었다.

"관기 교장님, 학교 옆 할머니네 꽃씨"


봉투를 펼쳐 안을 들여다보니 좁쌀보다 작은 까만 씨앗들이 한 움큼이나 들어 있었다. 그제야 학교 옆 할머니가 떠올랐다.



6학년 여학생들이 교육감기 동아리 축구 군 대표로 선발되어 도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이들은 중간놀이 시간이면 학교에서 그리 멀리 않은 동네 풋살 경기장에 달려가서 연습을 하곤 했다. 그 날은 학교 숲에서 풀도 뽑고 나뭇가지도 정리하다가 나도 따라나섰다. 아이들은 쏜살같이 달려가 금방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따라붙으려는데 학교 운동장 옆 아담한 집 텃밭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제법 연세가 있어 보였는데 텃밭 울타리 여기저기에 소담스럽게 꽃을 심어놓으셨다. 석죽 패랭이였다. 흰색, 분홍, 진분홍, 빨강 등 다양한 빛깔의 석죽 패랭이는 흰머리의 할머니를 볼 빨간 소녀같이 보이게 했다.

"할머니, 꽃을 많이 가꾸시네요." 하고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지나가던 사람이 뜬금없이 말을 걸으니 고개를 들어 멀뚱히 쳐다보셨다.

"관기 학교 교장이에요. 꽃이 정말 예뻐요."

"아~~ 학교! 나중에 꽃씨 받아다가 심어유."라고 하셨다.

"네, 할머니! 꼭 씨앗 받으러 올게요."

아이들의 축구 연습을 지켜보고 돌아오는 길에 큰 도로에서 벗어나 마을길로 들어섰다. 학교 옆에 동네가 있기는 해도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할머니 텃밭 꽃들을 보고 나니 마을이 궁금해졌다.




꼬불꼬불 뱅글뱅글 돌며 동네를 기웃거렸다. 동네 골목길은 생각보다 훨씬 예쁘고 아기자기했다. 장미 넝쿨이 어우러져 있는 집, 고추나 상추 대신 하얀 마가렛이 한들거리고 있는 작은 텃밭 집, 깨진 옹기에 돌나물이 소복하게 자라고 있는 단층집 등 꽃을 키우는 집이 많았다.

단아한 꽃들을 키우는 주인들이 상상되면서 괜스레 정이 갔다. 문패를 보니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다. 여기가 누구네 집이구나~하며 고개를 들이밀고 저기는 누구네 집이구나 기웃거렸다. 우리 관기 아이들이 유난히 정이 많고 밝고 사랑스러운 이유를 여기에서 찾은 것 같다. 왠지 아이들 곁으로 한 발 더 가까이 간 생각이 들어 기분 좋게 돌아왔다.



그렇게 학교로 돌아온 후 2주가 지났다. 꽃씨 받으러 가야 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씨앗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꽃씨가 영글어 떨어지려 하는데도 꽃씨를 받으러 오지 않자 직접 학교로 가져다주셨던 것이다. 할머니의 투박한 손글씨, 노란 고무줄, 둘둘 말아 접은 편지봉투 그리고 까맣게 영근 씨앗을 바라보노라니 고마운 마음에 뭉클해졌다. 흐린 눈으로 좁쌀보다 작은 씨앗 한 톨 한 톨을 모으면서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오늘은 아이들과 학교 숲에 무성하게 자란 채송화를 캤다. 우리 동네를 변화시켜라 프로젝트로 학생자치회에서 마을 환경 살리기 활동을 하러 가면서 채송화도 가지고 갔다.

아이들은 마을 곳곳에 채송화를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심었다. 석죽 패랭이가 지고 없는 할머니의 텃밭 둘레 한 귀퉁이에도 채송화를 심었다. 여름이 깊어 가면 할머니의 꽃밭에 아이들의 채송화가 알록달록 피어날 거다. 그리고 나는 내년 봄에 아이들의 숲에 피어날 '학교 옆 할머니네 꽃씨'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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