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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강 Aug 14. 2020

78세의 초등학교 2학년생

할머니는 오늘도 마실이를 타고 오셨다

"교장선생님, 진지 잡수셨어요?"
"네, 할머니도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학생이 진지라니? 78세의 2학년 우리 할머니 학생이 교장실 앞을 지나가면서 하시는 인사말이다.

할머니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입학식 날 학교에 가면 일본 순사가 있다는 삼촌의 말에 무서워서 짚더미에 숨어 며칠을 버텼다고 하셨다. 어린 조카를 놀리기 위해 장난삼아 한 농담이었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길을 틀어버렸다. 그렇게 배움의 기회를 놓쳐 버리자 할머니에게 학교는 아주 먼 길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는 농부의 부지런한 아내로 서릿발 같은 시어머니의 착한 며느리로 5남매를 낳고 키우면서도 학교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들딸 시집 장가 다 보내자 이제 학교에 가라고 하셨던 남편이 덜컥 병드셨고 병시중을 하느라 학교는 또 멀어졌다. 70세가 넘어 학교에 온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남편이 돌아가시고도 3년을 망설였다고 하신다.

한 번 놓친 배움의 기회를 다시 잡는데 7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닿을 듯 말 듯 긴 삶의 굴곡을 돌고 돌아 다시 그 끈을 잡으셨고 작년에 드디어 1학년에 입학하신 것이다.

할머니는 더도 덜도 아닌 초등학생 딱 고만큼으로 학교생활을 하신다. 학생으로서 준수해야 할 규칙과 질서를 그대로 지키시고 성실하고 모범적이시다. 손녀 같은 담임교사를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시며 부모님 같이 의지하시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방과 후에는 피아노와 우쿨렐레를 배우시고 돌봄 교실에도 함께 하신다. 경로당 가는 시간이 아깝다며 방학에도 돌봄 교실에서 한글 공부를 하신다.



언론에서 할머니의 사연을 본 사람들은 우리가 할머니를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하게 여긴다. 예전 사례를 들며 "반장님"이라고 부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냥 "할머니"라고 부른다. 6년간의 초등학교 생활을 끝까지 이수하고 졸업장을 받고 싶다 하시는 할머니를 돕는 것은 그냥 똑 같이 학생으로 대해 드리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무리 공부해도 한글이며 수학이며 자꾸 까먹는다며 속상해하신다. 여러 번의 수술 때문인 것 같다고 이유를 찾으시지만 나이를 어떻게 속일까·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읍내에 있는 학원에라도 다니고 싶은데 학원 끝나고 집에 오는 차편이 없다며 은근히 아쉬운 눈치길래

"할머니, 학생은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우는데 할머니는 이미 지혜로우시니까 학원까지 다니실 필요는 없으세요."라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껜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좀 특별한 학생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학교와 교사에게는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할머니가 계셔서 좋은 점도 많다. 도무지 쉬는 법을 모르는 성실한 학습태도 덕분에 학생들의 부산스러움까지 잠재운다는 담임의 말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빛도 너무나 사랑스러우셔서 할머니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할머니다. "교장선생님, 진지 드셨어요?" 하실 때, 같은 반 친구 지우가 아팠을 때는 흰 죽을 끓여다 주셨을 때, 쌍둥이 채원이, 채은이를 다독거려주실 때, 학교 텃밭에서 선생님의 선생으로 활약하실 때는 우리의 할머니이시다.

배움은 때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양이 하루가 다르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평생교육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평생 공부를 할 수 있는 기본 도구는 배움의 때가 있다. 미뤄서는 안 된다.

오늘도 전용 전동차 마실이를 타고 등교하신 78세의 할머니 학생은 자꾸 헷갈리는 한글 때문에 답답해하신다. 때를 놓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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