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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맘 Aug 26. 2021

사라진 공간, 추억으로 먹고 산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에 윗마을 구례사람, 아랫마을 화개사람이 모여든다. 화개장터에는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섞여 묘하게 연변이나 강원도의 억센 억양이 서로 얽혀 시끌벅쩍한 장터 분위기를 낸다. 어릴 때 가끔 청학동에서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하얀 수염을 쓰다듬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가끔 조선 시대로 타임 슬립을 한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지만, 나중에 청학동이라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화개장터에서도 십리 벚꽃길을 따라 펼쳐진 신작로를 걸어가면 1시간 걸리는 곳에 신흥리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하루에 2번 오는 버스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기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고, 버스를 탈 때마다 멀미하는 나에게 약을 미리 먹이기도 했다. 허나 탈 때마다 오버이트를 하는 나 때문에 집에 두고 가는 날이 많았다.

우리 집은 널따란 신작로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맞은편은 냇가라서 돌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로  헤엄도 치고, 피라미도 잡고, 고동도 잡고 했다. 밤하늘이면 반딧불이가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하늘에는 별이 촘촘하게 박혀 수놓은 이불처럼 드리웠고, 산이 에워싸고 있는 곳이었다.


10년 전에 살던 고향으로 첫 아이를 데리고 간 적 있다. 이미 외지인들이 물 좋고 산세 좋은 곳인 줄 알고 명당터로 잡아 낯선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집은 헐리고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목청 터지라고 싸우면 옆집으로 도망가곤 했는데, 옆집 할머니 집도 헐리고 없었다. 내가 거기에 살았다는 사실은 내 기억 어딘가에 있을 뿐 어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곳을 보고 처음에는 낯섦에 당황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잃어버린 허전함 때문에 자꾸 달달한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먹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고향집 공간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내 추억의 한 자락에서 아름다운 유년시절로 소환되어 나오는 곳으로 바뀌었다.

냇가의 돌도 세월이 바랜 것처럼 작아져서 비가 올 때면 콸콸 무섭게 내달음치는 물줄기를 받아 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아버지가 이장으로 있을 때 심은 벛나무는 이제 십리벚꽃길로 유명해져서 3월이면 전국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내가 알던 동네 사람들은 농사만으로 살 수 없기에 전국으로 흩어져 연락이 되는 사람이 몇 안된다.

이젠 그곳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외지인들이 정착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했고, 그곳에 정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이젠 그만 이별하라고 스스로 알려주는 곳이었다.

가끔 꿈에 내가 놀던 고향 길과 언덕, 산길이 생각난다. 4월이면 익어가던 매실과 푸르게 햇살 아래 커가던 녹차 잎, 여기저기 풀 뜯고 소리 지르던 염소들, 냇가에선 1 급수에서 사는 사는 피라미, 장어를 잡으러 낚싯대를 드리우던 아버지, 바구니에 까만 고동을 한 아름 잡아 올려와 식구들을 위해 된장국을 끓이던 엄마, 친구들과 마당에서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제기차기를 하며 놀던 동생, 친구 집 마당에 벌겋게 익어가던 감나무, 호두나무 등이 아련거린다. 그럴 때마다 부유하지 않았지만 나를 감싸던 풍경만은 고대광실 부잣집 못지않게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혜택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그 잃어버린 공간을 다시 만들려고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 반딧불이를 살리고, 하늘의 별을 소환해서 옛날 추억 한 자락을 아이들에게 눈으로 보여주고 싶다.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며,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주가 나에게 준 최대한 찬사임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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