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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슌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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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24. 2022

알고리즘 파도에 휩쓸리는 날이 있다

킬링 타임이라는 말도 아까운 일요일

 킬링 타임 Killing time. 할 일 이 없을 때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죽인다는 뜻을 가진 이 말속의 아이러니함을 알고 있는가?

 킬링 Killing은 행동을 수반한다. 킬링 타임이라 하면 으레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그림을 상상하게 되지만 직접 움직여야만 시간을 죽일 수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킬링 타임이란 죽은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해보려는 태도인 셈이다. 유통기한이 지나 노랗게 짓무른 양상추의 겉 부분만 뜯어내어 어떻게든 샐러드를 해 먹듯 상하기 직전의 시간을 붙잡아 뭐든 해 먹는 게 킬링 타임이다.

 타임 time은 불변하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간이란 뜻의 명사다. 시간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념 속에서의 시간 죽이기란 가능한 일일지 몰라도 내일을 향해 돌아가는 시곗바늘을 멈출 순 없다. 킬링 타임은 시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는 스스로의 무의식을 죽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둘을 조합하면 킬링 타임의 참된 의미는 속수무책으로 흐르는 시간의 멱살을 붙잡고 뭐라도 해야 하는 쪽에 가깝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누워 릴스나 숏츠 같은 숏폼 콘텐츠를 쓸어 넘기며 시간을 보내버린 후 자책하는 나의 킬링 타임과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다. 아무래도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하다. 적당한 단어 하나가 떠올랐는데, '삽질'은 어떨까?


 나는 어제 하루 종일 삽질을 했다. 침대에 누워 폰을 보기 시작했더니 다여섯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종종 오줌이 마려우면 화장실에 가거나 배가 고프면 부엌을 기웃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먹은 게 전부. 창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깊은 현타가 밀려왔다. 이런 쓰레기 같은 하루에는 킬링 타임이라는 말도 아깝다. 시간을 죽이는데도 어느 정도의 열정과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니까. 나는 강물 위에 실수로 떨어뜨린 흐물거리는 비닐봉지 마냥 거대한 알고리즘 파도에 휩쓸린 채 정처 없는 방황을 했을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비어버린 시간을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동안의 동향을 살펴보면 드라마나, 영화, 책과 같이 다소 호흡이 긴 콘텐츠의 소비가 크게 줄었다. 인스타그램의 짧은 만화나 릴스, 유튜브의 숏츠같이 짧고 간단하고 자극적인 콘텐츠의 소비는 크게 늘었다. 유튜브 영상들도 조금이라도 지루하거나 재미없다 생각되면 10초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빨리 감기 하거나, 그 마저도 허락되지 않을 땐 미련 없이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다. 나의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재미없거나 영양가 없는 무언가에 투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듯 하나, 그렇다고 잉여 시간과 에너지를 의미 있는 콘텐츠에 쏟는 것도 아니다. 되려 '미리 보기'스러운 짧고 영양가 없는 콘텐츠들에 더 쏟아붓고 있다.


 어쩌면 콘텐츠의 길이나 깊이에 따라 부담의 허들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여 소비했을 때, 그에 어울리는 양질의 정보나, 금전, 감상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한다. 양질의 콘텐츠는 소비하기 앞서 양질의 가치를 얻어야만 한다는 보상 심리가 부담감을 크게 키우고, 결국 부담의 허들 앞에서 선택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넷플릭스에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재미없는데 쏟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반대로 슛폼 콘텐츠는 부담의 허들이 낮다. 콘텐츠를 통해 양질의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거란 보상 심리는커녕, 기대도 없다. 간혹 어떤 중요한 인사이트가 얻어걸리게 된다면 기대가 없었기에 만족감도 크다.(사실 이런 경험은 최근 숏폼 콘텐츠를 수없이 소비했던 사람으로서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더불어 짧은 길이만큼 휘발성도 워낙 강해 기억 속에서도 쉽게 사라진다. 담배 같달까. 흡연자는 아니지만 가끔 피워본 담배의 감상이 딱 그러했다. 짧고 강렬한, 그러나 금방 휘발되어버리는. 그래서 '삽질'하는 기분이 더 크게 찾아오는가 보다.


 숏폼 콘텐츠가 담배처럼 헤로운 것은 아닐 테다. 건강을 해친다는 직접적인 연구 결과도 없을뿐더러, 잘 활용하면 오히려 짧은 시간에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제는 콘텐츠를 활용하는 사람의 자세다. 불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도, 죽이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숏폼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중독성만 경계할 수 있다면 잉여 시간을 만족으로 채워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중독의 늪에 빠져본 경험자로써 나는 경계하고 싶다. 끌려가는 대로가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 이끄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다. 슛폼 콘텐츠의 가장 큰 문제는 중독이고, 파도와 같은 거대한 흐름은 중독이 가진 가장 큰 파워니까. 알고리즘에 휩쓸려 중독의 파도에서 허우적대지 않으려면 더욱더 의식적으로 살아야 한다.

 귀결되는 결론은 하나다. 잘 살고 싶다는 것. 이 글의 모든 내용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부터 쓰였다. 지난 일요일에 쓰레기 같은 하루를 보낸 스스로를 참회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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