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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슌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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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Dec 12. 2022

체중계 위에 난생처음 보는 숫자가 떴다

속수무책의 시기

 내 일상엔 주기적으로 속수무책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 시기에 눈에 띄는 증상은 아래와 같다.


1. 밤, 낮이 바뀐 생활을 한다.
2.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3. 주변이 지저분해진다.
4. 살이 찐다.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나의 경우 1년 중 3-4번 꼴로, 짧게는 일주일에서 이주일, 길게는 두 달 까지 이 시기가 이어진다. 매년 약속한 듯 찾아오는 계절처럼 예측이라도 할 수 있다면 무어라도 대비를 해두었을 텐데, '속수무책',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뉘앙스 그대로 매년 쏟아지는 진흙 아래 두 발을 떼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올해는 어땠을까. 매년 이맘때 즈음이면 나의 게으름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이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속수무책의 시기'와 '연말 충동'이 겹친 모양이다. 속수무책 속에 허우적대던 중 무어라도 하라는 강렬한 마음의 끌림에 오랜만에 노트북의 하얀 화면을 앞에 두고 타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요즘을 속수무책의 시기라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최근 아니 어제, 정말 오랜만에 체중계 위에 올라갔는데 난생처음 보는 숫자가 체중계 위에 떠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위아래로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더 오버되긴 했다만- 차치하고서라도 내 몸뚱이로 그 숫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에 굉장함(좋지 않은 의미의)을 느꼈다. 수많은 가능성 중 왜 가장 반갑지 않은 가능성이 열려버린 것인가. 내가 만들 수 있는 숫자일 거라고 예상도 못 했던 숫자였던지라 충격이 꽤 컸다. 결국 다음날인 오늘은 하루 종일 굶다 저녁은 다이어트식으로 해결했다.

 하긴, 이상할 것도 없다. 일주일에 7일을 술을 마시고, 거기에 수많은 안주들... 헬스장은 출석을 잊은 지 오래였고, 최근 여행에서도 쉴 새 없이 먹었지... 최근에는 망가진 애플 워치를 핑계로 운동을 쉬고 있기도 했다. (운동할 때 애플 워치로 기록 안 해놓으면 운동할 맛이 안 난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당장 다음 주에는 오프라인 행사도 있고, 무엇보다 살이 쪘다는 자의식이 생기고 나니 내 모습이 싫어지려고 한다. 나는 살찐 내 모습 싫어한다. 가능한 한 내가 좋아하는 모습의 나이고 싶다. 그렇다고 뭐, 엄청난 결심이나 목표를 세우겠다는 것은 아니다. 부담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으로서. '차곡차곡의 시기'의 흐름을 잘 타길 바랄 뿐이다.



 1년 중 3-4번 꼴로 '속수무책의 시기'가 찾아온다면, 또 비슷한 횟수로 '차곡차곡의 시기' 또한 찾아온다. '차곡차곡의 시기'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내 컨디션과 바이오리듬, 주변 환경 뒤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찾아와야만 하는) 시기로 다시 건설적으로 건강한 자신을 만들어가고픈 의지를 동반한다. 차곡차곡의 시기의 루틴은 다음과 같다.


1. 잠자리에 일찍 들려 노력한다.
2. 의식적으로 휴대폰 사용을 줄인다.
3. 주변을 청소한다.
4. 먹는 음식에 신경을 쓰고, 꾸준히 운동한다.
5.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사람들만 만나려 노력한다.


 언젠가부터 뚜렷한 목표에는 부담을 느껴,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을 때 목표를 명사화하지 않고 동사화한다. 동사 형태로 목표를 설정하면, '그 행위'가 목표가 되므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내가 정한 행위를 하기만 하면 된다. '하는 나'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바라던 결과-체중, 학업, 대인관계, 그게 뭐든-또한 내 것이 되어있다. 차곡차곡의 시기는 이런 레이어를 쌓는 시기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행동을 '하는' 나를 쌓는 시기.

 욕심을 내자면 이번 차곡차곡의 시기에는 '쓰는 나'도 포함하고싶다. 6번, '매일 쓰려고 노력한다'를 넣으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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