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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두개의 향기

민중의 염원, 귀족의 권력으로 사용된 향

by 이지현

삼국시대에 종교적 신앙과 정치적 권위의 강력한 상징으로 깊이 뿌리내린 향(香) 문화는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두 개의 뚜렷하고 독특한 강줄기로 분명하게 나뉘어 흐르기 시작했다. 이 분화는 사회적 계층과 문화적 실천 방식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는 특징적인 흐름을 만들어냈다. 첫 번째 강줄기는 화려한 궁중과 문벌 귀족들의 웅장한 저택과 격조 높은 연회장을 우아하게 휘감아 돌며, 세련된 미학적 취향과 화려한 사치의 궁극적 정점을 향해 유유히 흘러갔다. 이 흐름은 왕실의 의례적 권위와 귀족들의 문화적 세련미를 동시에 담아내며, 국제 무역을 통해 들어온 최고급 향료와 정교한 공예품으로 표현되었다. 반면 두 번째 강줄기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깊은 고통을 겪던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을 품은 채, 미래의 구원과 희망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이 땅의 흙과 모래 속 깊숙이 스며들어갔다. 이 민중적 향 문화는 개인의 사치나 미적 취향보다는 공동체의 안녕과 구원을 갈망하는 집단적 신앙 행위로 발전했으며,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는 종교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향은 더 이상 단일한 의미만을 지닌 단순한 신성 물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얼굴을 가진 복합적 문화 현상으로 진화했다.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향의 의미와 기능은 다층적으로 확장되고 변형되었다. 때로는 왕실과 최고 권력자들의 세련된 미적 취향과 국제적 안목을 명확히 드러내는 정교한 문화 자본으로 기능했고, 국가 의례에서는 정치적 권위와 통치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반면 서민 사회에서는 이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초월하여 다가올 이상적 세계에 보내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집단적 신호였다. 이처럼 향은 단순한 물질을 넘어,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의 세계관과 가치체계,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복합적인 문화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귀족의 미학: 향, 권력의 향기가 되다

고려시대 향은 연등회(燃燈會)나 팔관회(八關會)와 같은 국가 주도 불교 의례에서 여전히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유지했지만, 그 중심축은 점차 궁정과 귀족의 사적인 생활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닌, 향의 근본적인 의미와 기능의 전환을 의미했다. 국가적 의례에서 빛났던 향의 신성한 불꽃은 이제 왕실과 귀족가의 정원과 내실, 연회장을 은은하게 비추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향은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더 이상 신과 인간 사이의 단순한 매개체가 아닌, 복잡하게 분화된 인간 사회 내에서의 위계질서와 세련된 미적 감각을 표현하는 정교한 문화적 장치로 진화한 것이다. 국가 의례의 공적인 장소에서 귀족의 사적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향은 초월적 존재와의 교감을 위한 도구에서 현세적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세련된 도구로 그 성격이 변모했다. 이러한 전환은 향이 이제 신과의 소통을 넘어, 인간 사이의 지위와 품격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세련된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교한 사회적 언어가 되어, 소유자의 취향과 계급, 그리고 문화적 감수성을 섬세하게 전달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게 되었다.


향을 입는 기술: 훈의(熏衣)와 향낭(香囊)

고려의 귀족 사회에서 좋은 향기는 그 사람의 인품과 지위를 반영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귀족들에게 있어 향기는 단순한 취향이 아닌,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교양을 드러내는 필수적인 문화적 언어로 기능했다. 향 연기를 피워 옷에 향기를 입히는 훈의(熏衣)는 귀족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이들은 대나무나 금속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훈롱(熏籠)이라는 특수 도구 안에 향로를 조심스럽게 배치하고 그 위에 옷을 널어, 고급스러운 침향이나 단향에서 피어오르는 향기가 비단 옷감 깊숙이 배도록 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옷에 향기를 입히는 행위를 넘어, 일종의 예술적 의식이자 사회적 의무로 여겨졌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향을 입힌 옷은 중요한 연회나 의식에 참석할 때 그들의 품격과 위엄을 높여주는 보이지 않는 장신구이자, 세련된 취향의 상징으로 작용했다. 또한 고려의 귀부인들은 화려한 비단에 정교한 수를 놓아 만든 향주머니(香囊)를 허리춤에 차는 것을 일상적 패션으로 즐겼고, 밤이면 향초(香草)나 귀한 향가루를 세심하게 채운 베개에 머리를 기대어 잠들곤 했다. 이처럼 몸과 의복, 그리고 생활 공간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은은한 향기는 그들의 섬세한 미적 취향과 높은 신분을 무언으로 전달하는 세련된 사회적 언어였으며, 동시에 귀족 문화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문화적 상징이었다.


공간을 채우는 향기: 연회와 사적 공간의 향

향은 단순히 개인의 몸을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생활하고 머무는 공간 전체를 정의하고 변화시키는 강력한 환경적 요소로 자리 잡았다. 고려 귀족들의 화려하고 호화로운 저택과 정교하게 준비된 사적인 연회 공간에서는 최고급 비색 청자로 제작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향로들이 단순한 장식품을 넘어 공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지배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격조 높은 연회가 시작되기 전, 세심한 주인은 가장 귀하고 희귀한 향료를 정성스럽게 선별하여 조심스럽게 피워, 손님을 맞이할 공간을 철저히 정화하고 그 품격을 한층 더 높이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단순한 향기의 확산이 아닌, 공간의 정체성과 주인의 지위를 명확히 선언하는 중요한 사회적 의례였다. 특히 시를 짓고 음악을 감상하며 예술적 감흥을 나누는 고급스러운 문화적 자리에서 정교한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하고 복합적인 향 연기는 단순히 좋은 냄새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참석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예술적 영감을 북돋우며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섬세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이르러 향은 과거 국가나 사찰의 공적인 종교 제례에서 주로 사용되던 신성한 도구에서 점차 벗어나, 세련된 귀족 문화의 핵심 요소로서 사적인 교류와 문화적 유흥의 장을 완성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장치이자 감각적 체험의 중심으로 그 기능이 확장되고 변화했다.




구원의 향기: 민중, 땅속에 희망을 묻다

희망의 의식, 매향(埋香)의 기원

매향이라는 독특한 관습은 고려시대 민중들 사이에서 깊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의식으로, 미래에 나타나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래불, 미륵(彌勒) 신앙의 토대 위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의식은 단순한 민간 신앙 행위를 넘어, 집단적 희망과 종교적 염원이 물질적 형태로 표현된 상징적 행위였다. 고려 후기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시기였는데, 외부로부터는 몽골 제국의 침략적인 침입과 일본 해적인 왜구의 지속적인 약탈이 이어졌고,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무자비한 수탈과 착취로 인해 일반 민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고통과 혼란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도저히 희망이나 위안을 찾을 수 없었던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초월적인 세계에 자신들의 간절한 염원을 의탁하게 되었고, 특히 다가올 미래에 미륵보살이 지상에 강림하여 건설할 이상적인 세계인 용화세계(龍華世界)에 자신들의 구원과 해방의 가능성을 투영했다. 그들은 정성스럽게 선별한 향나무를 특별한 의식을 통해 땅속 깊이 묻으면, 긴 세월이 흐른 뒤 이 향나무가 지하의 물과 흙, 시간의 신비로운 작용을 통해 자연적으로 변화하여 가장 귀하고 신성한 향료인 침향(沈香)으로 완전히 변모한다고 굳게 믿었다. 더 나아가, 이렇게 수백 년의 시간을 통해 신성하게 숙성되고 변형된 침향을 미륵이 지상에 내려와 용화세계를 여는 그 순간에 정성스러운 공양물로 바치면, 의식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과 그들의 후손까지 미래 세계에서 구원과 축복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다는 강렬하고 간절한 믿음으로 이 의식을 거행했다.


땅에 새긴 약속: 매향비의 증언

이러한 관습의 가장 유명하고 구체적인 증거는 1387년(우왕 13년)에 세워진 사천 매향비(泗川 埋香碑)이다. 경상남도 사천시 해안가의 바위 절벽 아래에서 발견된 이 역사적 비석에는, 불교 승려들이 주도하고 지역 민중들이 대거 참여한 무려 4,100명의 향도(香徒)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거대한 향나무를 특별한 의식을 통해 땅속 깊이 묻는 대규모 매향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음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 의식은 국왕의 만수무강(萬壽無疆)과 국토의 평안 및 백성들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하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규모 매향 의식이 진행된 시기는 고려 왕조가 내부적으로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왜구(倭寇)의 끊임없는 침입과 약탈로 인해 민중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고통이 극에 달했던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매향은 단순한 민간신앙적 행위나 개인적 기복 의례를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모든 구성원이 함께 행동함으로써 그들의 집단적인 염원과 희망,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실천적으로 표현한 의미 깊은 사회적, 종교적 행위였다.




하나의 시대, 두 개의 향기, 그리고 고려의 얼굴

고려시대는 한반도 향 문화의 르네상스였다. 삼국시대에 뿌려진 씨앗이 고려의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롭고 복합적인 모습으로 만개했다. 향은 더 이상 단일한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의 다양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사치와 구원, 시대의 양면을 증언하다

고려의 향 문화는 화려한 사치와 절박한 구원이라는 시대의 양면을 극명하게 증언한다. 이러한 이중적 문화 현상은 당시 사회의 경제적 계층화와 종교적 믿음이 만들어낸 복합적 산물이었다. 귀족의 웅장한 저택과 정교하게 장식된 내실에서 피어오른 고급 침향의 농후한 연기는 국제 무역을 통해 축적된 막대한 부와 세련된 문화적 취향을 과시하는 현재적 쾌락과 권력의 명확한 상징이었다. 이 향기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국제적 연결망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귀족 문화의 정수를 담아냈다. 반면,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사회적 불안 속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민중들이 갯벌과 해안가에 정성스럽게 묻은 향나무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초월하여 다가올 미래의 구원을 기약하는 희망의 씨앗이자 집단적 염원의 물질적 표현이었다. 이들에게 향은 단순한 미적 즐거움이 아닌, 공동체의 생존과 정신적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다.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향(焚香)과 땅속 깊이 묻히는 향(埋香)이라는 상반된 실천 방식은, 화려함과 불안함, 현재의 향유와 미래의 희망이 복잡하게 공존했던 고려 사회의 분열된 욕망과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적 거울이었다.


향, 시대를 기록하는 물질적 서사

결국 고려의 향은 그 시대를 기록하는 하나의 물질적 서사이자 과거를 향한 문화적 창문이다. 국보 '청자 사자뉴개 향로'의 비할 데 없이 우아한 곡선과 세련된 비취색 유약은 고려 귀족 문화가 도달한 미학적 성취의 정점을 생생하게 증언하며, 그 섬세한 조각과 균형 잡힌 비례는 당시 장인들의 탁월한 기술적 숙련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동시에, 남해안 해변가에 남겨진 '사천 매향비'의 투박하지만 힘 있는 글씨와 소박한 석재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미래의 구원을 위해 공동체적 희망을 만들고자 했던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집단적 염원을 감동적으로 증언한다. 이 두 유물은 모두 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고려 사회의 빛과 그림자, 즉 송나라와의 국제 교역이 가져온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번영, 계층 간의 깊고 복잡한 문화적 격차와 사회적 분화, 그리고 거란과 여진, 몽골 등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이 야기한 시대적 위기와 공동체적 결속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향의 향유 방식과 그 의미의 다층적 변화를 통해, 우리는 고려인들의 일상과 비일상, 욕망과 두려움, 미적 취향과 종교적 염원, 그리고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던 근본적인 세계관과 가치체계를 더욱 깊이 있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고려시대에 형성된 이 다채로운 향 문화의 전통은 이후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귀족들의 세련된 향유 문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격조 높은 문방사우(文房四友) 문화 속 향으로 이어졌고, 민중들의 집단적 신앙 공동체인 향도의 전통은 조선시대의 각종 계(契) 조직과 민간 의례 속에 그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의 향은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한 시대의 욕망과 신념, 예술과 사회를 담아낸 복합적인 문화유산이다. 그 깊고 다층적인 향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문화의 저변에 흐르며, 한국 향 문화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뿌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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