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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aree Feb 18. 2021

여름의 끝을 잡고, 열무의 끝을 잡고

열무김치 활용법 A to Z

수요일.
휴일이지만 아침 7시도 채 되지 않아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세화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장날에는 주차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늑장을 부리면 사려던 채소며 생선을 구경도 못하기 일쑤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서둘러 샤워를 한 뒤, 장 볼 목록을 정리해서 출발했다. 세화 포구에 도착하니 바다 물빛도 하늘도 그야말로 환상이다.


장터 한복판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단골집들에 눈도장을 찍고, 태풍에 피해는 없었는지 안부와 근황을 묻는다. 이른 아침 막 차려진 좌판들은 싱싱하고 풍성하고 왁자하다.




제주에도 어느새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달력을 보다가 모처럼 휴일과 오일장 서는 날이 겹친다는 걸 깨닫자마자 번개처럼 머리를 때리는 한 단어가 있었다.

"열무!"


김장김치가 조금 물리기 시작할 즈음, 그러니까 날씨가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열무의 시즌이 시작된다. 배추와는 또 다른, 맵고 푸른 열무로 김치를 담그면 여름 밥상에 제대로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더 늦기 전에,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서둘러 열무김치를 담가 먹어야 했다. 엄마표 젓국을 넣고 버무린 꼬릿한 김치를 떠올리자 군침이 돌고 마음이 바빠진 것이었다.

추석이 지난 9월 말이지만 다행히 오일장에는 아직 열무가 나와 있었다. 열무 2.5킬로와 홍고추, 마늘, 생강을 샀다. 열무는 많이 가늘고 얇다고 해서 부드럽거나, 굵고 튼실하다고 해서 억세지 않다. 좋은 종자의 맛있는 열무를 잘 고르는 것도 운이고 복이다. 이번 열무는 대성공이었다. 연하고 실한 것이 꽤 만족스러웠다.

사 온 열무를 마당에 풀어놓고 다듬어 소금물에 절인다. 열무는 절대 오래, 짜게 절이면 안 된다. 딱 열무 잎이 숨이 죽을 정도까지 절인다.

1. 감자를 두어 개 삶아 식기 전에 잘 으깨어둔다. (풀 대신 삶은 감자를 으깨어 양념과 함께 버무리면 열무의 아삭한 식감을 오래 지켜주고 풋내도 잡아준다)
2. 마늘, 생강, 양파를 깨끗하게 손질해서 믹서에 갈았다. 그다음 홍고추를 넣고 씨까지 다시 한번 거칠게 갈아준다.
3. 양파 1개를 얇게 썰어둔다.

마늘과 생강, 양파를 믹서에 넣고 갈아준다
홍고추도 숭덩숭덩 썰어넣고 거칠게 갈아준다
기본양념이 완성되었다


절여진 열무는 풋내가 나지 않도록 살살 헹궈 채반을 받쳐 물기를 빼둔 뒤 손가락 두 마디 반 정도의 길이로 끊어 자른다. 거기에 1,2,3을 넣고 젓국, 고춧가루, 약간의 깨소금을 버무린다.
이번에는 멸치젓국을 썼다. 소금에 잘 삭은 멸치젓을 끓여 하룻밤 동안 한지에 가만히 걸러낸 진하디 진한 엄마표 젓국이다. 조금만 넣었는데도 김치를 버무리는 잠깐 사이에 젓국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환기는 필수다.

밀폐용기에 둘로 나눠 담는다. 하나는 가게에, 하나는 집에 두고 한동안 원 없이 먹을 예정이다. 김치 하나로 이내 마음이 부자가 되었다. 뿌듯하다.



열무김치는 푸릇하게 채 익지 않았을 때부터 폭삭 익어 늘어지듯 척척 감길 때까지 다 다른 맛이 있고, 저마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설익은 열무김치는 볶음밥이나 기름진 요리와 함께 먹으면 맵싸한 맛이 느끼함을 상쇄시켜주어 좋다. 후라이드 치킨과 함께 먹으면 정말 닭을 '무한'흡입할 수 있다.

소면을 푸짐하게 삶아 적당히 잘 익은 열무김치를 얹고 국물을 넉넉히 부어 담은 열무김치 물국수. 아삭한 열무 줄기에 국수를 칭칭 감아 한가득 입에 넣고, 시원한 국물을 들이켜면 더위가 저만치 가신다. 물국수 취향이 아니라면 소면에 새콤달콤한 양념과 참기름, 깨소금, 고추장을 더해 열무김치와 함께 비비자. 사라진 입맛을 찾아주는 열무 비빔국수가 뚝딱 완성된다.

냉장고에 나물이 있다면 두어 가지 담고, 달걀 하나 호로록 부쳐 보리밥과 함께 비벼보면 어떤가. 푹 익은 열무김치를 건져 넣고 참기름 두른 열무비빔밥. 이건 아무래도 양푼에 썩썩 비벼 껴안고 먹어야 제 맛이다.

무엇보다 열무김치는 내가 사랑하는 안주이기도 하다. 국물까지 넉넉히 담은 열무김치에 얼음을 한 줌 띄우면 꽤 괜찮은 여름철 소주 안주다. 김치는 너무 많이 익히지 않아도 괜찮다. 알싸하고 아삭한 열무를 집어먹고 소주 한 모금. 시원하고 매콤한 국물 한 숟가락에 또 한 모금. 슬렁슬렁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앉아, 이미 몇 번씩 보고 또 봤던 영화를 틀어놓고 즐기는 혼술의 밤. 캬아.




오랜만에 오일장에 다녀오니 마음이 푸지다. 장날에는 충동구매를 하거나 너무 많은 양을 사게 되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끈한 순두부와, 만원에 한 소쿠리 가득 담은 싱싱한 갈치에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마늘과 매운 고추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갈치조림을 펼쳐놓고 햅쌀로 갓 지은 밥에 열무김치를 걸쳐 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위로가 된다. 휴일은 그렇게 시작되고 평화롭게 저물었다.

열무김치 아슬하게 부여잡은 여름의 끝자락.
또 놓친 게 뭐가 있을까.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부지런을 좀 떨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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