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ynaree Feb 18. 2021

Let it go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어디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늘이 잔뜩 흐리고 빗방울도 살짝 떨어진다. 보름 전만 해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다녔는데 갑자기 낯선 계절이 코앞에 와서 위협하는 느낌이다. 운동하고 난 후라 그런가. 날씨 탓인가. 갑자기 몹시 허기가 진다.


지난 9월을 끝으로, 2년 반 정도 운영해 온 식당 '월정곰닭'의 영업을 종료했다. 여러 가지 개인 사정으로 인해 서울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가게도 함께 옮겨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월정곰닭 '시즌2'는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곧 새롭게 시작할 예정이다.


당연히 이것저것 준비하고 알아봐야 할 것들 투성이다. 아직 집은 제주에 있지만 짧게는 며칠, 길면 일주일 넘게 서울에 머물다가 제주에 돌아오는 일을 두 달 넘게 반복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외국 여행할 때 시차 때문에 적응기간이 필요한 것마냥 날씨와 기온 차이 때문에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서울만 해도 이미 추운데, 부모님이 계신 여주는 서울보다 2-3도가 더 낮아서 아침 운동하러 나가보면 동네 논바닥이 꽝꽝 얼어붙어있다. 도 꽤 시리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제 오후에 제주로 돌아왔다. 공항을 빠져나오며 목도리를 풀어 가방에 넣었다. 코트를 벗어들어도 그리 춥지 않았다. 머리는 복잡하고 피곤으로 녹초가 되었지만.

그래, 여기는 아직 안온하구나.

괜찮아, 이 곳은.

이 곳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유예하고 싶어졌다.


가게를 정리하고 나니 제주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좀 조바심이 났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을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한라산에도 다녀오고, 이곳저곳 오름도 뒤지고 다녔다.  

아직 모르는 곳과 가보지 못한 곳들 투성이인 제주에서도, 그리고 지난 5년여 동안 많이 변한 서울에서도, 지금 나는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계절의 문턱이라 그런지 더욱 묘한 기분들에 사로잡혀 요즘은 잠을 자주 설친다.


그래서.

뭘 먹으면 좋을까.

이사를 앞두고 있으니 부지런히 냉장고를 파먹어야지.


묵은지를 꺼낸다. 양념을 대강 털어 숭덩숭덩 자른 뒤 냄비에 깔았다. 친구들이 왔을 때 남기고 간 구이용 삼겹살 한 뭉텅이도 꺼내서 김치 위에 깔아본다.

잘 삶아서 소분한 뒤 냉동실에 얼려둔 무청 시래기 한 덩이 꺼냈다. 돼지고기 위에 시래기를 올리고, 마늘을 굵게 다지고, 파, 양파, 매운고추도 툭툭 썰어 올린다.

고춧가루와 후추 약간 더하고, 참치액과 국간장을 조금씩 넣고, 물은 반 컵 정도만 붓고 끓이기 시작한다. 김치가 익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불을 조금 줄이고 푹 고듯이 충분히 더 끓여준다. 국물이 졸아들어 자작해지면 고기를 자르고 접시에 담는다.

탄수화물을 줄이기 위해 쌀을 하나도 넣지 않은 잡곡밥을 만들었다. 계란국을 끓이고, 잡곡밥 반 공기에 바삭한 김자반을 반찬삼아 점심을 먹는다.


빨갛게 맵거나 국물이 얼큰한 건 아니다. 적당히 삼삼하게, 적당한 지방. 그리고 섬유질이 풍부한 식단이다.


게 또 집밥 한 끼를 해결했다.


아직은 괜찮. 겨울은 아직 문턱이다.

조급해 할 필요 없이 천천히 가자.

Let it g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