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딸아이는
또래 아이들처럼 열대어, 장수풍뎅이, 소라게, 햄스터를 키웠다.
그리고 어느날 강아지를 사달라고 졸랐다.
늘 시작은 딸아이였지만 순식간에 불어나는 햄스터 새끼들의 우유를 먹이는 일은 내차지였고, 햄스터는 자라서 집안 구석 구석에 숨었다.
진땀을 흘리며 햄스터 찾아다니기를 반복하던 나는 다시는 아무것도 집에 들여오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쓸고 닦고 치우고 정리하는 다섯 식구가 함께 사는 하루 일정이 분주하기도 하고, 요리를 좋아하는 나는 요리를 만들고 치우느라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것도 이유였다.
"강아지가 들어오면 엄마가 집을 나갈거야."
사람사는 공간에 동물이 들어 온다는 것도 귀찮고 싫었다.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메마른 감정 때문이었을까?
어느날 외출하고 돌아와보니 거실에 새장이 하나 놓여있었다.
노란 모란 앵무새가 새장 안에서 불안한 듯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남편과 막내는 "강아지는 아니잖아?" 하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본다.
모란앵무와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됐다.
막내 딸아이는 밤에는 춥다고 새장 위에 얇은 담요를 덮어 주고, 먹이와 물을 정성껏 챙겨주었다.
처음 시작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새는 가족이 되었다.
숲의 따사로운 햇볕도, 길가에 이름 모를 꽃들도 ,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며 살랑이는 산들 바람도, 조약돌을 던지면 동그란 무늬를 키우며 퍼져 나가는 호숫가의 물도, 자유롭게 파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들도 그냥 그대로 자연 속에 있어서 아름답고 평안하다.
어느 순간 둥지 안의 새가 가여웠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하늘을 훨훨 마음껏 날으며 살아가야 할 저 모란 앵무는 어쩌다 우리집까지 왔을까?
책임감으로 포장하고 날마다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 주었다.
털갈이를 할 때면 열어 놓은 창문안으로 들어온 바람이 온 집안에 작은 솜털을 날렸다.
막내는 새장 안에만 갇혀 있으면 불쌍하다며 새장 문을 열어 놓고 학교에 갔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소중한 책들의 귀퉁이가 한 뭉텅이씩 새 부리에 갉아 없어지는 씁쓸함도 맛보아야 했다.
잘게 잘린 책조각들은 모란 앵무의 배설물과 섞여 여기 저기 나 뒹굴고 있다.
치워야하는 수고보다 나는 환경과 생활방식의 차이 등 논리를 앞세워 딸아이에게 동물과 사람이 같이 살면 안되는 이유를 합리화 시킨다.
이별 불안 슬픔... 아이의 얼굴에서 읽히는 복잡한 감정에 한발짝 물러선다.
시간이 흐를 수록 새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아침에 익숙해진다.
한마리는 외롭다며 새를 키우는 지인이 분양해 준 새와 한쌍이 된 모란 앵무는 알을 네 개나 낳았다.
지극 정성으로 품어 부활한 새끼들을 온 식구가 반기고 기뻐했다.
생명의 탄생은 경이롭다.
그리고 너무나 소중하다.
모란 앵무는 우리가 자신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몸집의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새끼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오래 함께하면서 그들의 눈빛과 행동으로 교감할 수 있다.
우리는 입으로 밥알을 씹어 잘게만들어 모란 앵무 새끼들이 부리로 먹게 하고, 깃털을 쓰다듬고 이름을 지어 부르며 서로를 확인하면서 사랑을 키웠다.
모란앵무의 눈을 바라보고 천천히 눈을 깜박이면 새도 따라서 천천히 눈을 깜박였고, 새의 이름을 부르면 대답으로 날개짓을 크게 두번 빠르게 했다.
그 뿐아니라 강아지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때마다 식구들을 반기며 아름다운 새소리를 냈다.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정이들었고 애정으로 가득한 새가 죽었다.
새의 죽음으로 막내는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먹먹한 슬픔으로 통곡했다.
막내를 달래고 양지바른 곳에 모란앵무를 묻어주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나는 깨달았다.
지금 어른이라고, 몸이 다 컸다고 어른은 아니라고.
이전의 나는 자연을 사랑하고, 순수하고 여리고 맑았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 기억들은 모란앵무를 잃은 슬픔으로 며칠을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마음 아파해도 괜찮다고 위로하고 있었다.
대자연 속의 사람은 너무나 작다.
아프리카 빅토리아 폴의 악마의 목구멍의 수천 톤의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는 물길 속에서 난 이미 너무나 작은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