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종교에 대한 가치관이 무너지는 사건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의 《음식 문화의 수수께끼》(원제: Good to Eat, Riddles of Food and Culture)
놀기도 좋아했지만 지적 욕구가 잠시 높았던 대학교 1학년, 서점에서 이 책을 보고 음식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겠거니 하며 읽기 시작했다. 이 책 한권으로 나는 종교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과 저자에 대한 경외심, 늘 그랬던 것들을 의심할 수 있는 시각을 깨닫게 되었다.
"인도 사람들이 소를 신성시해서 잡아먹지 않는 건 사실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뭐라고? 처음엔 이해가 안 갔다. 소를 신으로 여기는 건 그들의 깊은 신앙심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경제학 시간에 배우는 '기회비용' 계산의 결과물이라니. 소 한 마리를 당장 잡아먹으면 며칠 배부르겠지만, 살려두면 평생에 걸쳐 우유도 주고, 밭일도 도와주고, 심지어 똥까지 연료로 쓰면서 착취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슬람교의 돼지고기 금기도 마찬가지였다. 돼지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중동의 건조한 기후에서 돼지를 키우려면 물과 곡물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 결국 '환경에 최적화된 음식 선택'을 종교 교리로 포장했다는 것.
그날 밤, 천주교가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나의 종교를 어떻게 새롭게 정의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때부터 종교를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종교를 일종의 '사회 운영 시스템'으로 바라보니 많은 것이 이해가 되었고 마음이 편해졌다.
유대교의 안식일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쉬었으니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종교적 이유 말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일주일에 하루는 무조건 쉬게 만드는 '노동자 보호법'이었던 셈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장이 직원에게 "너 쉬어도 돼"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쉬라고 하셨어"라고 하는 게 훨씬 강력했을 테니까.
외할머니와 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부터 성당에 나갔다. '주님의 뜻'이라는 교리는 자동적으로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원하는 것이 틀어질때마다 나는 항상 '주님의 뜻이려니' 하고 슬픔이나 갈등이 짧았다. 좋지 않은 성과나 결과에서 남들보다 짧은 갈등과 작은 슬픔을 끝내고 다시 룰루랄라 하는 내가 남들에겐 참 한없이 가볍게 보인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 탓이 아니라 '그분의 뜻'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 심리학에서 말하는 '외부 귀인'의 건강한 활용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조금은 뻔뻔한 이런 '믿음'덕에 낙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불안함 없이 안정적인 정서를 갖추었으나 이런 성향 때문에 절실함이 없던 터라 큰 인물은 되지 못했다.
요즘 주변을 보면 종교 없이도 각자 나름의 '종교 사용법'을 만들어 쓰는 사람들이 많다.
매일 아침 러닝을 하는 후배는 "달리기가 내 종교"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에게 러닝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후배는 "덜 가지고 더 행복하게"라는 철학으로 살아가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환경운동에도 열심이다.
여기 브런치 스토리에도 자신, 또는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오래동안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의 숫자들을 보면서 크게 놀랐다. 작가들 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이토록 다양하고 깊을 수가 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미 각자의 '종교'를 가지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다만 그것을 종교라고 부르지 않을 뿐.
그렇다면 나만의 종교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마빈 해리스가 알려준 것처럼, 핵심은 '실용성'에 있다. 종교든 철학이든 취미든, 그것이 당신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중요한 건 그 시스템이 당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명상이든, 독서든, 글쓰기든, 요리든, 아니면 정말 종교든 상관없다.
다만, 그것이 당신을 속박하고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만든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다.
아무리 오래되고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도, 그것이 정말 당신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는 것. 스무살에 만난 그 한 권의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당연한 것에 물음표를 붙이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반백년을 살고 보니 꼰대와 라떼가 되어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자기확신파 교주가 되어 있는 나에게 두 번째로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영화 <콘클라베>였다.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다양성이고,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의심하는 용기'를 갖고 '의심 없는 확신'을 버리는 나만의 '종교 사용법'을 업그레이드 해야 할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