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와 비쥬얼 좀 치는 일본호러의 전설
영화 '괴담'은 앞서 소개했던 '지옥'과 더불어 일본 공포영화사에서 시각적·연출적으로 실험적이고도 인상 깊은 작품 중 하나다.
두 영화 모두 일본 전통과 괴담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괴담은 지옥과는 또 다른 결의 접근을 보여준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전개 방식이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기에, 오히려 그 차이가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처음 이 영화를 추천받았을 땐, 제목을 어설프게 기억해 버린 탓에 한참을 헤맨 끝에 엉뚱하게도 '망령의 괴묘저택'을 찾아봤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괴담은 총 4편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영화로, '흑발', '설녀', '귀 없는 호이치', '찻잔 속에'라는 네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180분가량의 러닝타임을 채운다. 각 편은 일본 고전 문학과 전통 설화를 바탕으로 해 몽환적이고도 정갈한 공포의 결을 보여주며, 단순한 무서움을 넘어 미학적 공포라는 인상을 남긴다.
1. 흑발(黒髪 / The Black Hair)
한때 사랑했지만 가난 때문에 떠났던 아내. 성공한 뒤 새로운 여인과 결혼하지만, 진심이 없었던 그는 결국 옛 아내가 그리워 돌아간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건...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집과 긴 흑발뿐. 애절하고 기묘한 시간의 균열을 통해 귀신의 슬픔이 스며든 이야기.
2. 설녀(雪女 / The Woman of the Snow)
눈보라 속에서 설녀(설귀)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한 남자. 그녀는 살려주는 대신 그 만남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후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아내에게 그 비밀을 말해버리고, 설녀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아름답고 서늘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전설적인 설화.
3. 귀 없는 호이치(耳なし芳一の話 / Hoichi the Earless)
눈먼 비파 연주자 호이치는 전쟁의 혼령들을 위한 연주에 초대받는다. 그 사실을 안 절에서 호이치의 몸에 경문을 써 귀신으로부터 보호하려 하지만... 귀를 빠뜨리고 만다. 전쟁의 망령과 설화가 섞인 비극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이야기.
4. 찻잔 속에(茶碗の中 / In a Cup of Tea)
작가는 찻잔 속에 얼굴이 비친 괴이한 이야기를 쓰려다 실제로 그 괴이함에 휘말려버린다.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괴담을 쓴 자가 결국 그 안으로 사라지는.... 유일하게 미완의 이야기로, 괴담 자체에 대한 은유처럼 다가온다.
각 에피소드의 시각적 스타일은 전통미를 품고 있으면서도 극단적으로 연극적인 미장센을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지금 봐도 낯설고 기묘하게 다가온다. 이야기 자체가 무섭다기보단, 불길한 정적과 색의 대비, 의도적인 시간의 느림이 주는 서늘함이 오래 남는다.
각 이야기들이 놓인 시대 배경도 흥미롭다. 흑발과 설녀는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금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귀 없는 호이치는 헤이안 시대의 전쟁과 죽음을 예술로 승화한 인물의 비극을 다룬다. 마지막 찻잔 속에는 메이지기 혹은 현대에 가까운 시기로 보이는데, 창작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괴담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처럼 괴담은 단순히 무서운 이야기들이 아니라, 시대의 공기와 인간의 본성을 정교하게 담아낸 시각 예술 및 철학적인 느낌이고, 전설의 고향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피소드라면 '설녀'이지 않을까? 가장 공포영화답고 정석적인 괴담의 느낌?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지만, 적당한 그로테스크함과 시각적 강박, 혹은 전통 괴담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꼭 한 번쯤은 접해보면 좋을 듯하다. 그래도 지옥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