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진 Jun 19. 2023

#32 '당근'의 뒷이야기

어제도 하나, 오늘도 하나를 팔았다. 이사 오기 전에 다 팔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팔고 나니 후련하다. '언젠간 쓰겠지' 그 지독한 생각이 오래도록 내 발목을 잡았다. 헐값에라도 팔아버리면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이 갔다거나, 친환경적으로 용돈을 벌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이사 온 새집이 지하철역에서 가까워 예전처럼 꽤 걸어 나갈 필요도 없었다.



어제는 오래된 신발을 처분하는 날이었다. 사놓고 몇 번 신어봤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갈색 신발. 자주 신던 신발을 신을 수 없게 될 때에만 종종 꺼내 신었던 덕분에 상태는 꽤 온전했다. 굳이 따져보자면 신발을 신은 시간을 다 합쳐도 한 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 일하던 중 거래요청이 왔다. 상대방은 꽤나 단호하게 시간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퇴근 후 집에 뛰어가다시피 들어갔다가 신발만 들고 다시 나왔다.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혹시나 엇갈릴까 봐 미리 연락했다. 그는 말이 없었다. 약속장소인 지하철역 입구로 갔는데 아뿔싸, 아무도 없었다. 상대방에게만 단호하고 정작 본인은 지각을 하는 것인가 싶어 짜증이 갑자기 밀려왔다. 



한참을 기다렸다. 그는 메시지로 지하철 역사 안에 있다고 답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벽에 기대어 쉬는 아주머니와 숏패딩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개찰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출구 쪽에서 손에 신발 들고 서성이는 나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고 예민했던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였다.



"오, 당근." 연로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신발을 가리켰다. "당근 하러 오신 분 맞으세요?" 나는 짧게 물어봤지만 할아버지는 또렷이 대답하기보다는 흐릿하게 끄덕이고 말았다. 잔뜩 갈라진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약속된 돈을 꺼내 나에게 쥐어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신발을 가져갔다. 



불현듯 혼자 짜증을 냈던 것이 죄송했다. 허리를 굽혀 인사했지만 그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발걸음을 재촉해 개찰구 쪽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돌아오며 생각했다. 앱을 사용하는 것도 서투르시겠지, 두꺼운 손으로 타자를 치기도 번거로우실 거야, 천 원 정도 빼드렸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열차는 이미 승강장을 떠났을 것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좋은 마음은 언제나 오늘보다 느리게 온다.


-


2021년 12월 15일 처음 쓰다.

2023년 6월 19일 고쳐 쓰다. 

매거진의 이전글 #31 오늘도 '당근'하셨습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