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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Jun 26. 2023

#38 김치와 닭칼국수

백수인 친구와 오래간만에 만났다. 그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퇴사했다. 남은 한 해의 끝자락은 조용히 쉬며 내년을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그가 그려놓은 휴식의 조각 중엔 어릴 적부터 즐겨 먹던 닭칼국수가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리고 오늘, 그가 닭칼국수를 말한 지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함께 타고 드라이브를 떠났다. 운전을 하는 그의 눈빛이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일보다 식당의 대기줄을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합정역에서 30분 정도 달려 서울을 벗어났다. 그리 멀리 떨어져 온 것도 아니고, 찾아오는 길이 험난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항상 경계의 땅의 새로운 곳에 온 듯한 느낌을 물씬 풍긴다. 빌딩이 사라지고 숲이 나타났고 근처엔 회사보다 군부대가 많아 보였다. 군부대와 골프장을 지나 식당에 도착했다. 오늘은 평일이고 아직 12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식당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우리는 대기를 해야 했다. 


칼국수를 먹기 전 우리는 그릇에 김치를 옮겨 담았다. 야 여기 김치도 맛있다. 운전할 때는 아무 말 없던 그가 식당에 들어오자 얇게 흥부 한 것 같았다. 칼국수 집에 김치가 맛없으면 안 되지. 이미 터져나가는 손님들로 어느 정도 기대를 품은 나는 젓가락으로 배추김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래, 이맛이다. 칼국수는 맛을 안 봐도 되겠다. 이미 초구(初球)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오래지 않아 칼국수가 나오고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지도 않고 칼국수를 각자의 입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와이프랑 둘이 오면 항상 남기는데 너랑 오니 다 먹을 수 있겠다. 친구가 꽤나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만족스러웠다. 연신 국수가락을 삼킨 덕에 허기는 쫓은 지 오래지만 이런 음식은 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것은 식탐이 아니라 칼국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대접을 다 비웠다.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우리는 이직에 대해서, 친구들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다시 칼국수를 회상했다. 다음에도 한 번 더 가자. 못 갈 것 없지. 날이 아주 차갑지는 않아서, 휴가를 신청한 평일이라서, 칼국수가 맛있어서, 집에 돌아와 낮잠을 푹 잘 수 있어서 너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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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8일 처음 쓰다.

2023년 6월 26일 다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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