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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단걸 Jun 12. 2022

피리 부는 아저씨

새벽 달리기의 풍경 



새벽 달리기를 시작했다. 새벽 6시가 되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로 스포츠 브라를 입고 낑낑대며 러닝용 타이즈를 입고 양말을 신고 물 한잔을 마시고 밖으로 나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러닝을 하면서 들을 음악을 플레이하고, 런데이 어플을 켜고 서늘한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간다. 경안천변의 산책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다. 여전히 비몽사몽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디에선가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내 플레이리스트가 잘못되었나 싶어 애플 워치로 현재 재생 중인 음악을 확인했더니 내가 선택한 곡이 맞았다. 이 새벽에 어디에서 피리소리가 들려오나 주변을 살피다 산책로에 있는 정자에 아저씨 한 분이 고고하게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계단에 다리를 걸치고 마지막으로 스트레칭을 한번 하고 나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피리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간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부터 새벽 달리기를 하려고 했었다. 아직까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지 않았고, 오히려 해가지고 난 이후 밤바람은 시원했기에 굳이 일어나기도 쉽지 않은 내가 벌써부터 새벽 달리기를 시작할 이유가 없었다. 새벽형 인간이 아닌 내가 계획보다 한 달이나 일찍 새벽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어이없게도 하루살이 떼의 공격 때문이었다. 저녁에 달리기를 하면 하루살이들은 내 입으로, 내 콧구멍으로, 내 눈으로 거침없이, 맹렬히 돌진해 그들의 짧은 생을 마감하곤 하는 것이다. 이는 무척 성가신 일이었다.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울을 확인하면 내 얼굴 곳곳에 하루살이들의 사체들이 들러붙어있었다. 코를 풀면 내 투명한 콧물 속에도 한두 마리의 하루살이가 액체 괴물에 빠진 것처럼 죽어있었다. 아, 성가신 하루살이들! 새벽형 인간이 아닌 나를 강제로 새벽에 기상하게 만든 것은 작디작은 하루살이 떼였다. 


3월 중순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어느덧 3개월째 달리기를 꾸준히 하고 있음에도 나의 달리기 페이스는 도통 7분대에서 단축될 기미가 없었다.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퇴근한 덕분인지 저녁에 달리기를 하면 신명이 나지 않았다. 달리기를 마치면 개운한 기분이 들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것 같았던 내 하루에 이것 하나는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에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달리기를 시작할 때 느꼈던 그 벅찬 기분을 더 이상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달리기는 10분을 뛰고, 2분간 걷는 것을 세 번 반복하는 코스까지 향상되었으며, 쌀쌀한 날씨 속에 비니를 눌러쓰고 장갑을 끼고 달리기를 시작했던 3월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던 4월보다 숨이 덜 가빴다. 분명 나의 달리기 기술은 점점 나아지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페이스는 계속 제자리였다. 이제는 내가 왜 달리기를 하는 지를 생각하는 일은 줄었고, 그저 퇴근을 하면 별생각 없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경안천변을 달렸다. 즉, 달리기는 이제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3월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살도 좀 빠졌으면 했고, 페이스도 향상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너무 큰 욕심도 아닌데 그 어느 것도 나의 희망에 가까워지지 않았다. 


새벽에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30분 달리기를 15분씩 나누어서 달리기로 했다. 아직 잠도 덜 깼고, 내 몸뚱이도 침대에 조금 더 머물기를 원할지라도 이왕 새벽에 달리기를 할 것이라면 조금 무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까짓것 하다가 무리라고 판단되면 걸으면 될 일, 한번 해보자 하며 도전을 했다. 첫날 나의 페이스는 7분 05초였다. 첫 15분은 7분 01초, 두 번째 15분은 7분 10초였다. 어랏, 이게 되네? 7분 15초에서 30초를 왔다 갔다 하던 내 달리기 페이스가 새벽 달리기 첫날부터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지금은 6분 41초의 페이스를 기록하고 있다. 새벽형 인간이 아니라서 아침 출근할 때마다 헐레벌떡 집을 나서곤 했던 내가 새벽형 러너에 조금 더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새벽 달리기를 하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지점을 스쳐 지난다. 우리는 혼자 달리기를 하거나 걷기 운동을 하지만 어쩐지 함께 운동을 하는 것 같다. 한 번은 첫 15분 달리기를 끝내고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인 채로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내 옆으로 한 아저씨가 지나가면서 나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낯선 이의 ‘엄지 척’에 웃음이 비실 비실 새어 나왔고 왜인지 힘이 되었다. 이 새벽에, 하필 이 강변에 나와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을 내 러닝 크루라고 생각하니 오늘 하루가 든든한 기분이 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피리 부는 아저씨는 피리를 불고 있다. 파란 하늘 아래, 초록으로 물든 낮은 언덕을 뒷배경으로 한 정자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듯, 청아한 피리소리를 뒤로 한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계단을 오른다. 


I’ll be doing fine in the morning

Happy days will come in the morning

I’ll be moving on in the morning 


'In The Morning' by George 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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