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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홍 Jun 19. 2022

바라보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윤택은 언덕 위 낡은 벤치에 앉아 달동네를 내려다보았다. 근무를 마치고는 온갖 비바람에 해진 나무 벤치에 걸터앉아 시간을 죽인 뒤 동네로 내려가는 것이 그의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였다. 하늘색이 어두워질 때쯤 마찬가지로 어두운 근무복을 입은 채 집에 들어가면, 시장에서 사 온 반찬에 밥통에서 푼 밥과 함께하는 저녁이 기다리고 있다.


오 분쯤 지났을까, 윤택의 옆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인 낯선 이가 벤치의 옆자리에 합석했다. 윤택은 깜짝 놀라 벤치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편함이 뒤를 이었다. 이 남자는 누구일까. 어느 집에선지 모를 개가 격하게 짖는 소리가 둘 사이를 관통했다. 그런 윤택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형완은 이내 고개를 돌려 윤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며칠째 깎지 않은 수염과 땀에 절은 듯한, 불쾌함의 경계선에 선 형완의 냄새가 윤택을 침범했다. 윤택은 형완을 흘긋 보았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인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 남자는 굳이 내 옆에 앉는 것도 모자라 내게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일까. 이 시간 이 벤치는 나의 것이었다. 불편함이 임계점에 도달할 때쯤 윤택은 형완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얼굴에는 노동의 흔적이, 시선에는 무언지 모를 따뜻함이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눈에서는 자조와 시비만 가득해야 할 터였다. 당초 잠깐만 흘긋 보고 말 것이었지만, 윤택은 어느새 눈을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소용돌이쳤으나 그 끝에는 연민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윤택은 저도 모르게 형완의 뺨을 올려붙이는 상상을 했다. 거의 실제로 그럴 뻔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혼란 속에서 윤택은 동네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형완의 얼굴을 마주했다. 오래된 녹색 야상과 벙거지 모자, 정리를 포기한 채 사자 갈기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온 반백의 머리. 매일 술이라도 걸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드는 눈빛. 시선이 작업화로 향할 때쯤 형완이 입을 열었다.


"고생이 많아."


하루 고된 일과에서 나온 기분 나쁜 숨결보다도 더욱더 큰 혼란스러움이 휘몰아쳤다. 이 남자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종교 권유? 시비? 그 무엇도 아니었다. 형완의 말 한마디에, 그저 그 단어 말고는 다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윤택은 도망치듯 벤치에서 일어나 내리막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매일 걷는 급경사진 길이지만 무엇이 평소와 달랐는지 넘어질 뻔했다. 고생이 많다고? 이제 집에 들어가면 윤택은 홀어머니와 저녁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밥을 차리는 와중에도 윤택의 머릿속에는 형완의 모습과 냄새와 그가 남긴 말로 가득했다. 한 마디 말이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쌀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어머니는 무심하게 열무김치로 젓가락을 향했다. 윤택도 시금치를 집어 들었다.


해는 더 기운 가운데, 형완은 윤택이 사라지자 굳이 벤치 가운데로 옮기지 않은 채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품에서 식은 삼각김밥 두 개를 꺼내 뜯기 시작했다.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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