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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민 Oct 10. 2019

문익환과 윤동주


문익환과 윤동주



<북간도의 십자가>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왔다. 북간도, 그러니까 두만강 건너 북간도로 향했던 함경도 사람들, 그 가운데 신앙으로 뭉쳐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까지 깊은 족적을 남긴 분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가운데 문익환과 윤동주가 등장한다....... 그 둘의 이야기를 곱씹는 것으로 영화의 감흥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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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생 윤동주는 해방 6개월 전, 일본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와 문학은 걸출한 광채로 한국 문학사를 휘감고 있거니와 윤동주에게는 일찍 떠난 그를 대신하듯 머나먼 훗날까지 ‘나한테 주어진 길’을 옹골차게 걸어갔으며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작 <십자가>)라는 싯귀처럼 시대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일생을 살았던 친구가 있었다. 늦봄 문익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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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은 북간도 용정 명동촌 고향 친구였다. 윤동주와는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로 자랐다. 그런데 문익환은 윤동주의 문재(文才)를 부러워했고 윤동주는 문익환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지녔다고 한다. 문익환이 후일 결혼하고자 그 부인을 만났을 때 부인의 집안에서는 폐병쟁이라 하여 반대가 있었으나 한 번 문익환을 만나 본 부인이 결사적으로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는 일화가 있는데 물론 부인 박용길 장로의 사람 보는 눈의 높음을 인정해야겠으나 ‘영화배우 같았다’는 문익환의 외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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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문익환 사이에서 있었던 작은 일화 하나도 슬몃 웃음이 나오게 한다. 학창시절의 어느 날 윤동주는 문익환의 모자를 탐낸다. "야 익환아. 그 모자 나 주면 안되겠니?” 윤동주의 모자가 낡았을 수도 있고 문익환의 모자가 월등 질 좋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윤동주 집안이 모자 하나 못 살만큼 빈한한 집안도 아니었는데 다짜고짜 문익환의 모자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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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그만큼 문익환이 쓴 모자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싸구려 옷을 걸쳐도 심지어 죄수복을 걸쳐도 영화배우 강동원이 입으면 빛나는 패션이 되듯이 문익환의 모자는 문익환의 수려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청춘들이 많이 행하는 것처럼 윤동주도 그 모자를 쓰면 자신도 문익환처럼 보이리라 착각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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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윤동주는 후일 연희전문 학생 시절 고향에 돌아오면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대학생 모자를 일부러 쓰지 않았을 만큼 소탈한 사람이었다. 미남 문익환은 능청스레 답한다. “호떡 사주면 바꿔 주지.” 문익환은 배가 터지도록 호떡을 얻어먹은 후 모자를 건넨다. 미남의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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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잘생긴데다 공부도 잘해서 윤동주의 기를 죽이기도 했던 문익환이지만 역시 윤동주의 글쓰는 능력만큼은 21세기 말로 ‘넘사벽’ , 즉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었다. 문익환은 자신보다 늦게, 저학년으로 편입해 왔지만 (공부는 문익환이 위였다는 또 하나의 증거) 선배의 인정을 받고 문예지 편집을 맡게 된 윤동주로부터 시 한 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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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익환도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큰 사람이었다. 정성껏 한 줄 한 줄 다듬고 깎아서 쓴 시를 윤동주에게 내밀었을 때 윤동주는 딱 한 마디로 문익환을 무참하게 만든다. “이게 어디 시야?” 이 말 한 마디는 문익환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문익환 본인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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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시는 나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었다. 동주가 살아 있어서 내가 하는 성서번역을 도와주었다면(살아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나는 영영 시를 써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문익환, 「하늘 바람 별의 詩人 尹東柱」, 월간중앙,197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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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의 시심(詩心)은 윤동주의 한 마디로 꺾였으나 시는 문익환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게 된다. 윤동주 송몽규가 보지 못한 해방을 보고 그 이후 수십 년을 살아내린 그의 인생 역정은 드라마 그 자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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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손 꼽히는 구약학자였던 문익환은 오랜 세월 강단의 신학자이자 성서 번역가로 살았다. 그는 시편과 아가 등 구약성서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시들을 번역하여 소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를 번역하면서 다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의 핀잔으로 꺾여 버린 시심을 다시 끄집어내기 시작하게 된다. 윤동주가 있었으면 그에게 떠맡겼겠으나 친구는 일찌감치 먼 곳으로 가고 말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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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절친한 친구였던 동갑내기 장준하의 죽음을 맞아 그의 인생은 헝클어진다. 출판인이자 정치인이며 재야 민주화운동가였던 장준하는 유신 정권의 눈에 돋은 가시 정도가 아니라 그 가슴에 꽂힌 대못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그가 1976년 8월 당최 가지도 않는 산에 등산을 갔다가 석연찮은 죽음을 맞았을 때 문익환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다. 얌전한 목사, 책상머리의 구약성서 번역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향해 분노를 내지르고 새로운 세상의 빛을 뿌리는 예언자로 나선 것이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게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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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한 친구 장준하의 의혹 넘치는 죽음을 계기로 그는 드디어 얌전한 목사, 책상머리의 구약성서 번역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향해 분노를 내지르고 새로운 세상의 빛을 뿌리는 예언자로 나선다. 내 겨레에게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이들을 향하여 포효했고,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진 가운데"(하박국) 못된 놈들에게 등쳐 먹히는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 절규하는 맹렬한 시인으로 내닫는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도 있으나 늦봄 문익환의 열정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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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늦게 세상을 본"(현실에 참여한) 이후 그가 죽은 1994년까지의 18년 동안 그는 11년이 넘도록 감옥에 있었다. 야곱의 돌베개 따위는 그의 고행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고, 엘리야 (성서 속 선지자가 왕의 박해를 피해 메뚜기와 꿀만 먹으며 숨어 살았음)가 잡아먹은 메뚜기도 11년 동안 문익환이 입에 넣어야 했던 관식보다는 그 맛이 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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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윤동주보다도 젊었던 학생들이 군부독재에 연일 분신으로 항거하던 무렵, 서울대학교 강연에 나서던 문익환을 어머니 김신묵 권사가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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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환아. 꼭 이거 한 마디는 해 주거라. 일제 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그렇게 죽는 거 봤니. 네가 가서 꼭 부탁하거라. 제발 죽지 말고 싸우라고.” 어머니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강연을 시작하려던 찰나 또 한 명의 서울대학생이 온몸에 불을 붙인 채 전두환 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죽어갔다. 이 참극을 눈 앞에서 지켜본 문익환 목사는 스스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간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곱씹고 있었다.

![](https://cdn.steemitimages.com/DQmX483dDAEvE4TM9rpbqQjxmJKtPMrbVY8pQKg1VMcZ4dw/image.png)

“이동수는 살고 늙은 내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갔고 나는 욕스럽게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고 지지하는 전국민과 해외인사에게 드리는 말씀> 민중의 소리, 제 17호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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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수감된 이후 1년여 뒤 마침내 6월항쟁이 폭발했고 군부독재는 6.29선언으로 항복했다. 감옥 문이 활짝 열렸고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철창을 나서 자유의 몸이 됐다. 문익환 목사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87년 7월 8일. 공교롭게도 그 다음 날은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교문앞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연세대생 이한열의 장례식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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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생활의 피로도 씻기 전에 문익환은 상복을 입고 장례식 단상에 오른다. 그곳에서 그는 연설이 아닌 절규를 한다. 그러나 그 절규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이었다. 문익환은 1970~1980년대 한국을 지배한 군부독재, 그리고 비인간적인 사회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다. 전태일부터 이한열까지 무려 2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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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희생처럼 우리 역사의 디딤돌이 된 이름들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절규에 실린 이름들을 들으면서, 역사의 깊은 잠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렸던 이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은 꺽꺽거리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아마 그 순간 문익환은 윤동주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즈음 그가 남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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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스물 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 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 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 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그 앞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습작기 작품이 된단들

그게 어떻단 말이냐. 넌 영원한 젊음으로 우리의 핏줄속에 살아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예수보도 더 젊은 영원으로

동주야 난 결코 널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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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한열의 서울 시청 앞 노제에는 한국 역사상 최대라 할 인파가 집결했다. 그 육중한 인파와 그들이 내는 소음 가운데 서울 시청 깃대에는 때 아닌 파랑새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아 꽤 오랫 동안 사람들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한열의 넋이 파랑새로 왔다며 수군대기도 할 만큼 진기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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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이 그 파랑새를 보았다면 그는 윤동주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세월을 넘어 시대의 파도를 넘어 고되지만 참다운 삶, 누추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글 한 줄에 밤을 지새고 혼을 담아 시어(詩語) 하나 하나를 매끈하게 만들던 친구 윤동주의 모습을 파랑새 안에서 발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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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윗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나온다.... 그들을 다시 본 느낌 매우 서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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