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하루종일 날씨가 좋았는데 진짜 비소리 맞나? 옆집에서 밤에 세탁기 돌리는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긴 여름이 장마와 달리 최근에 비 한방울 없이 파아란 하늘을 보는 즐거움은 정말 한국의 가을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시골 읍내 논밭 옆에 우뚝 세워진 건물이라 주변건물의 방해가 전혀 없는 구조이기에 이 물소리가 빗소리가 맞다면 이 얼마나 근사한 운치인가. 안방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거실로 나온다. 더 넓은 창으로 비의 향연을 듣고 싶어서다.
이거 웬걸. 안방에서는 토닥토닥 베란다를 두드리던 빗소리가 거실에 나오니 조용해진다. 코너로 된 아파트라 위치만 바뀌어도 밖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눕는다. 비에 촉촉이 나의 몸을 상상하며 비와 함께 잠을 깬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코로나로 힘든 시기였고 혼자 견뎌낸 시간 또한 길었다. 그렇게 지나간 상념에 잠을 설친건지 빗소리 덕분에 개운하게 잠을 잔건지. 일어나니 10시가 되어간다.
연휴에 일찍 나갈일도 없지만 새벽에 비가 온 건 나만의 비밀인 마냥 밖은 화창하다. 살짝 안개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이미 해는 멀리 떴고 나의 태양은 다시 떠 올랐다.
쉬는 날에는 꼭 뒷산이라도 올라가고 싶다. 한달에 한번은 가야지 하는데 그것조차 쉽지않는 일상이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산행을 하기로 한다. 등산복을 제대로 챙겨입지 않고 다니는 편인데 오늘은 척봐도 등산객인지 알만한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걸친다. 붉은 캡모자 그리고 주황색 점퍼를 골랐다. 신발장에서 신발은 형광오렌지색으로 꺼낸다.
혼자 올라가는데 눈에 잘 뛰어야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사람을 잘 찾을거니까. 괜한 상상이긴 하지만 산에 가면 이상하게 초록색과 보색대비인 붉은 계열의 옷을 챙겨입게 된다.
낙엽이 상당히 떨어진 길은 이미 가을이다. 도시의 건물에 갇혀 모니터와 휴대폰만 보던 사람의 시선에만 가을이 없었다. 낙엽을 찍고 하늘을 찍으며 산으로 간다. 25분 거리에 있는 300미터 안되는 앞산이지만 갈 때마다 배낭에 먹거리를 채워서 소풍가듯 올라간다.
“1시간이면 가는 데를 뭐 그리 오래 있나”
처음 올라 갔을 때 나는 4시간 반만에 산행을 끝냈다. 물론 중간에 올라가면서 쉬고 한 시간들이 한시간 넘게 앉아 있었고 올라간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다르게 완주하면서 더 길어진 이유도 있다. 산 정상에서 내려보는 마을 정경이 기분좋았지만 오늘은 컨디션에 따라 정상까지 갈수도 있고 못갈수도 있다.
벌써 3번째 올라가는 동네 앞산에는 가을 바람이 가득하다. 햇살이 구름에 가려 딱히 덥지는 않은데 바람은 가을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사이로 새소리가 실려온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운동은 일부러 하지 않지만 굳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런 소리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유튜브를 하지 않지만 시작하고 싶게 만드는 자연의 매력이다. 나 혼자 듣기에는 너무 고요한 아름다운 새소리와 바람소리. 산에 핀 꽃들은 크지도 많지도 않지만 눈에 확 들어온다. 정상을 목표로 앞만 보고 가면 만나지 못할 야생화들이 친구처럼 다가온다.
하얀색, 노란색, 보라색.
꽃이름은 있겠지만 내가 아는 건 야생화로 통칭한다.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게 날아다니는 나비색도 노랗다. 모든 나비가 노란색은 아니겠지만 오늘은 딱 노랑나비만 보인다. 폰 카메라를 켜려고 하자 멀리 날아간다. 도망가듯 날아가는 나비를 보며 휴대폰은 접으려다 아쉬운 마음에 그냥 숲길 그대로 하늘아래 나무줄기의 위상을 카메라로 담는다.
산길의 계단은 화면에 이쁘게 나오지만 아직은 산의 입구라 도로의 차소리가 들린다.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담기엔 좀 더 올라가야 한다. 청각보다 시각으로 즐기기로 한다. 자연은 초록이라고 하지만 똑같은 초록색은 아니다. 연두색도 있고 진한 초록도 있고 연한 초록도 함께 한다.
산에는 계절이 숨 쉰다.
나무에는 시간이 잠들어 있다.
꽃에는 행복이 피어있다.
지난밤에 꿈이 무엇이었든 지난주에 내가 왜 화가 났던 가을이 익어가는 산에서는 햇살처럼 모든 현상이 부서진다. 진정으로 쉬고 싶으면 자연을 만나라는 말이 다시 한 번 와 닿는다. 30분만 걸어 나와도 자연은 가을을 보여준다.
들판은 노랗게 익어가고 길에는 국화가 화려하게 피어있다. 그림을 그려도 이런 풍경은 아닐 것이다. 멀리 유명한 산을 찾아가지 않아도 만나는 이런 동네 산이 나는 좋다.
사실 산이 아니어도 가을을 느끼는 시골의 정취는 나에겐 휴식같은 여행이다. 그동안 지독하게 컴퓨터와 휴대폰 속에 갇혀 자연의 변화를 못느끼고 있었던게다. 이렇게 세상은 자연이 아름답게 계절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터치하나로 나의 시간에 갇혀 살고 있었다.
첫 산행보다는 빠르지만 1시간 만에 3분의 2 높이에 위치한 팔각정까지 도착했다. 집에서 보면 상당히 높아보였는데 올라오면 이렇게 금방이다. 여기에서 15분 더 올라가면 정상이다. 그러나 역시 오늘 오면서 중간중간 벤치에 앉아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일단 오늘 산행은 여기까지다. 팔각정 2층에 오르자 벌러덩 누었다. 사람들이 올라오고 그들이 켜놓은 음악소리도 정겹다. 그러나 나혼자 벤치 한줄을 차지하고 누워 있는거 민폐가 될거 같아 일어났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팔각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바위가 있다. 바위에 오른 뒤 다시 눕는다. 이렇게 돌 위에 누우면 내 방의 돌침대 마냥 그냥 편안하다. 적당히 달구어진 바위는 오후의 태양아래 따듯하기까지 하다.
고개들어 보니 하늘은 파랗고 일어나 앉으면 들녘은 노랗다. 이것이 진짜 가을이다. 멀리 아는 건물들이 보이고 그들은 오늘이 연휴지만 분명히 바쁘게 지낼 것이다. 골목에 있는 근사한 카페를 가서 음악을 들으면 오후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유시간이다. 산에 올라가는 건 커피값도 안드는 지출이지만 땀에서 배출되는 탁기는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건강하다.
건강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고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주말이다. 일상의 패턴을 한번씩 바꾸는 건 습관을 바꾸거나 나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도전까지는 아니지만 집에 있으면 게을러진다. 누워서 모든 세상을 터치하고 웃고 웃는다. 바보상자 속에 빠진 내가 서글퍼지만 자주 그런 나를 자학한다. 가을은 거리고 나가야 한다 가을은 산에 올라야 한다. 가을에는 나를 위한 산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