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Oct 22. 2016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2 7년만의 외출

망상과 현실 사이, 당신의 마릴린 먼로는 무엇인가?


삶에 치이고 찌든 날, 차가운 맥주 한 병을 사다 놓고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고전 영화를 보는 것. 이처럼 우아한 재미가 또 있을까.

올드한 관현악 사운드, 과장된 억양과 화려한 코스튬 그리고 짙은 화장. 쌀쌀하다 못해 쓸쓸해지는 가을, 고전 영화 한 편이면 풍요로운 밤을 만끽할 수 있다.

 


7년만의 외출

아내 헬렌과 아들 리키를 휴양지로 떠나 보내고 혼자가 된 리처드 셔먼. 맨하탄에 거주하며 출판사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그는 이제 막 결혼 7년차로 접어든 38세 남성이다. 집으로 홀로 돌아오는 길, 그의 손에는 아들이 놓고간 패들이 들려 있다.


셔먼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셔먼네와 카우프먼씨 내외, 그리고 인테리어 일을 하는 두 남자들까지 총 세 가구가 살고 있다. 아무도 없는 집은 모처럼 평화롭기 그지없다. 셔먼은 이 평온함을 제대로 만끽하려 한다. 간만에 얻은 자유지만 헬렌은 매일 밤 10시마다 안부 전화(혹은 점호)를 하겠다고 했으며, 주치의인 서머스 박사는 술과 담배, 기름진 음식들을 멀리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일상의 제약들로 자유와는 점점 멀어지는 삶에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갑자기 아들의 장난감을 밟고 넘어지는 셔먼. 그리고 때마침 울리는 초인종 소리.


황급히 문을 열기위해 뛰어나간 그의 눈 앞에는 완벽한 실루엣의 금발 미녀가 서 있다. 처음보는 여자이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하려는 망상에 흥분한 나머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다가 갑자기 "Oh, No!"를 외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담뱃갑을 서랍에 넣고 잠근 뒤, 열쇠는 아예 책장 위로 던져 버린다.


헬렌의 전화를 기다리며 독서를 하려는 셔먼은 브루베이커 박사의 <남자의 본능>이라는 책을 펼쳐든다. 그러나  마저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잠시 일어난 사이 카우치 위로 화분 하나가 떨어져 박살이 난 것. 화가난 셔먼은 윗 층을 바라보며 사람 죽일 일 있냐고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범인이 아까 초인종을 울린 금발 미녀였다는 것을 알아챈 후 만면에 젠틀한 미소를 띄운다. 그리고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여자를 집으로 초대한다.


흥분과 불안에 휩싸여 술과 담배를 찾는 셔먼. 분위기를 띄울 음악도 골라본다.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 숙고하다 라흐마니노프의 레코드판을 축음기 위에 놓는다. 찰나의 망상은 또 다시 시작된다. 웅장한 피아노 협주곡과 함께 우아하고 섹시하게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 그들은 피아노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격정적인 키스를 퍼부어 댄다.



때마침 울린 초인종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와 부푼 기대감을 안고 문을 열어보니 수위 크루훌릭이 문 앞에 서 있다. 며칠 전 헬렌이 러그를 보수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며, 러그를 수거해 가겠다는 것. 필사적으로 그를 돌려보낸 셔먼은 무더위를 식혀줄 얼음을 준비하려다 또 아들의 장난감을 밟고 넘어진다.


그리고 두번째 초인종이 울린다. 진짜로 그녀가 왔다.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진앤소다를 마시고 싶다는 그녀에게 셔먼은 스카치앤소다나 진앤토닉(마티니)가 낫지 않겠냐고 묻는다. 결국 마티니 한 잔을 손에든 그녀는 자신을 상업광고모델로 소개한다. US카메라의 화보도 찍은 적 있다는 그녀는 카우프먼씨가 유럽으로 여행을 간 사이 윗 층 집을 렌트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틀 전 22세가 된 기념으로 샴페인도 한 병 샀지만 뚜껑을 열지 못해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셔먼은 샴페인을 가져오라고 하고, 늦었지만 생일을 기념하는 건배를 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아까의 망상대로 격정적인 러브씬을 만들어 보고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트는 셔먼. 그러나 정작 그녀는 클래식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어 점점 산만해지다가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보며 셔먼에게 연주를 해달라고 한다. 망상에서와는 달리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는 셔먼. 망상과 현실의 온도차가 꽤나 크다. 여자까지 합세해 광란의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다 돌연 키스를 시도하려는 셔먼 때문에 둘은 피아노 의자 뒤로 나동그라진다. 셔먼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그녀에게 윗 층으로 돌아가 달라고 한다.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불안해진 그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바라보며 도리안 그레이의 흉측한 초상화 같다고 느낀다.


다음 날, 자신의 정신을 쏙 빼놓은 여자로부터 멀리 도망가기 위해 2주간의 휴가를 요청해 보지만 사장은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재출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 본다. 뜨끔한 셔먼은 사장의 방을 빠져 나와 다시 브루베이커 박사의 책을 펼쳐 든다.


『제 3 장 결혼 7년차의 권태기』


결혼한 부부의 권태기는 특히 7년차에 심해진다. 또한 부녀자들이 무더위를 피해 휴양지로 떠나는 바캉스 시즌에 더욱 심해진다고 한다. 셔먼은 이와 같은 내용에 공감하여 출간을 결정하고 저자인 브루베이커 박사와 약속을 잡는다. 그러나 상업적이고 저속한 표지 때문에 크게 실망한 브루베이커 박사는 셔먼의 사무실을 빠져 나가려다 엄지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는 그에게 집중한다. 셔먼은 지난 번,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다 실패했다는 얘기를 꺼내 놓으며 심리 상담을 요청하지만, 그는 충동을 멈추려는 노력만이 해답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 그녀가 상업 광고 방송에서 <피아노 의자 사건>에 대해 떠벌리는 망상을 시작하는 셔먼. 그리고 망상과 현실을 분간 못한 나머지, 아내가 혹시 그 소문을 들었는지 확인하려고 휴양지로 전화를 연결한다. 아내는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셔먼의 친구 맥켄지와 헤이라이드를 하러 나가있어서, 베이비시터가 대신 전화를 받고, 아내로부터 전달받은 별다른 메세지는 없으며 리키의 패들을 놓고 온 것 같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아 낸다.



셔먼은 당장은 안도감으로 기분이 좋아졌지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며 아내와 맥켄지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망상 속에서 맥켄지와 아내 헬렌은 말이 끄는 수레에 가득 담긴 건초 더미 위에서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는 아내도 맥켄지와 데이트를 했으니, 자신 또한 윗 층 여자와 데이트를 할 권리가 있다고 정당화 한다. 결국 전화번호부에서 카우프먼씨의 연락처를 찾아내 전화를 거는 셔먼. 여자에게 저녁도 먹고 영화도 보자며 데이트를 신청한다.


데이트 후, 집으로 돌아온 둘. 때마침 러그를 수거하러 들른 크루훌릭에게 둘이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된다. 불안해진 셔먼은 담배에 의존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들의 패들을 휴양지로 부쳐 주려고 포장지를 찾고 있는 셔먼. 죄책감 때문이다. 그러나 마땅한 포장지가 없어 신문으로라도 싸보려고 시도해보는 그의 뒤로, 그녀가 내려온다.


카우프먼씨의 집과 셔먼의 집은 원래 계단으로 이어져 있으나 판자 하나로 막아 두 집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간단히 판자에 박힌 못을 빼고 아랫 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결국 안방의 침대를 차지하고, 밤새 소파에서 손을 까딱이며 새우잠을 잔 셔먼은 그녀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때 맥켄지가 집으로 찾아 온다. 셔먼의 망상 속에서 헬렌과 데이트를 즐겼던 바로 그 맥켄지다. 그는 리키의 패들을 가지러 왔다고 말하지만, 망상과 의심으로 가득찬 셔먼은 그에게 주먹을 날린다.


시계는 아침 8시 47분을 지나고 있다. 결심한 듯 여자에게 아침을 같이 못먹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직접 패들을 가져다 주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셔먼. 출판사에 전화해 2주간 휴가를 떠났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집 밖으로 뛰어 나간다.


여자는 정신없이 뛰어나가는 셔먼을 창문 너머로 불러 세우고, 신발을 던져 준다. 마음이 급해 맨발로 뛰어나간 셔먼을 위한 배려다.

 


영화 『7년만의 외출』에 드러난 편집증적 성향

편집증은 정신분열보다는 덜 기괴하다. 우울증 보다는 덜 우울하고, 강박증보다는 통제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반사회적 성격보다는 로맨틱한 면이 있다. 편집증적 성격의 주요 증상은 망상이다. 영화 <7년만의 외출>의 주인공 리처드 셔먼(38세)의 경우도 불쑥 불쑥 떠오르는 망상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러나 편집증의 망상은 비교적 현실과 맞닿아 있는 내용을 주제로 하며, 체계적이고 지속적이므로 정신병 수준이 아닌 이상 실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달콤한 상상과 우울한 몽상은 예술적 창조력에 불을 붙여 주기도 한다.


포켓북을 출판하는 작은 회사에 다니는 셔먼은 사장인 브레이디씨를 대신하여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작품 선택, 표지 선정, 홍보 계획까지 그의 손이 안닿는데가 없다. 어느 날, 포켓북으로 출간할 작품을 골라 보다가 심리학자 브루베이커씨가 저술한 <남자의 본능>이라는 책을 본 셔먼은 신선한 논리에 빠져든다. 결혼 후 7년차가 되면 부부 생활에 권태를 느끼며, 이러한 권태는 바캉스 시즌에 배가된다는 것.


잘생기고 멋진 남자들이 뭇 여성의 마음을 빼앗고 있을 때, 파티장 구석에 쭈뼛거리며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타입이었던 셔먼은 7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단 한번도 외도를 저지른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망상 속에서 그는 비서 모리스양, 간호사 핀치씨, 그리고 아내 헬렌의 친구인 일레인의 숭배를 받는 카사노바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헬렌은 셔먼이 와이셔츠에 (실수로) 여성의 립스틱을 묻혀 오는 경우에도 크랜베리 소스가 묻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남편을 믿는다. 혹은 무시하거나.


부정한 망상으로 인한 죄책감과 남성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열등감은 결혼 7년차, 여름 바캉스 시즌에 결국 폭발하고 만다. 아내와 아들을 메인주(Maine)의 휴양지로 피서 보낸 후에도 셔먼은 자유롭지 못하다. 아내의 안부 전화, 서머스 박사의 처방에 따른 금주ㆍ금연 그리고 고지방ㆍ고단백 식품 금지령까지... 여러 제약에 발묶여 제대로된 <홀로 됨>을 만끽 하지 못하는 셔먼.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금발 미녀는 지루한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그와 동시에 아내 헬렌에 대한 부정 망상으로 괴로워 하기도 하는데, 부정 망상이란 자신의 배우자가 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으로도 알려진 부정 망상은 편집증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기질적 특성 중 하나인 질투심으로부터 발생한다. 물론 상대방을 너무 사랑하게되면 질투나 의심이 들 수는 있다. 그러나 불륜이나 외도가 아니라는 직접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망상을 지속하는 경우는 병적 수준의 망상이다. 대부분의 사랑꾼들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망상을 멈추기 때문이다.


물론 셔먼의 경우 그저 가벼운 신경증적 수준의 편집 성향이 있는 것일 뿐, 정신병은 아니다. 의심이나 망상은 신중함과 꿈이라는 말으로도 대체된다. 이처럼 가벼운 편집 성향은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과오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며, 건설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극 중 등장하는 브루베이커 박사 또한 셔먼이 자신의 실수(피아노 의자 사건)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그를 <정상>이라고 판단한다. 심리학적으로 자아 이질적인 관찰 자아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자기 객관화가 되는 상태이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극히 정상인 셔먼이 왜 잦은 망상으로 고통받는 것일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불만족스러운 현재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방어 기제로 이상적인 상황을 지어 내거나,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 보고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확인하려는 수단으로써 망상을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망상이라는 것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있게 사표를 써 사장 눈 앞에 내던 지는 것, 부당한 상사의 발언에 요목조목 따져 묻는 것, 의심가는 상황을 속시원하게 파헤치는 것부터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바로 집으로 순간이동을 하고 싶다는 상상에 이르기까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는 그것들이 바로 망상이다. 그러나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으므로 망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상상 혹은 망상

주인공 셔먼은 망상꾼이다. 항상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그럴때마다 불안정한 자기(Self)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망상을 즐겨 한다. 소심한 탓에 망상 후 "Oh, No! Not me. NOT ME!"(아니야! 진짜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이내 후회하고 말지만, 그는 망상을 멈출 수 없다.


망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


망상은 과거의 경험(트라우마)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전에 겪었던 수치심, 증오, 불안 등 부정적인 기억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현실이 아닌 망상으로 철수하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한 경험, 실패한 경험, 상실이나 약탈 등 무엇인가를 빼앗긴 경험이 있는 경우, 현실에서 또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현실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셔먼 또한 즐거운 상상 보다는 부정적인 망상을 더 많이 한다. 자신의 도덕심과 양심이 타격을 입을까봐, 아내가 바람을 피울까봐 혹은 아내가 자신이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될까봐 겁이나서 지레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보며 자신을 혹사시킨다.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서 나타난 셔먼의 망상을 들여다 보자.


#01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젓가락 행진곡 사이의 온도차

윗층 여자를 집에 초대한 셔먼은 분위기를 살려줄 음악을 고르기 시작한다.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 고심끝에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틀어놓는 셔먼. 그의 망상 속에서 여자는 라흐마니노프의 곡과 함께 우아하고 섹시하게 걸어 들어온다. 이내 셔먼이 직접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고, 둘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격정적인 포옹과 키스를 하며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실제로 집에 찾아온 여자는 클래식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더러 감자칩을 샴페인에 찍어 먹으며 해맑게 웃는 미숙한 어린 아가씨일 뿐이다. 망상에서처럼 셔먼은 피아노를 연주하긴 하는데, 연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아닌 젓가락 행진곡이다. 여자까지 합세해 광란의 앙상블을 만들어 가던 중, 셔먼은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다 피아노 의자 뒤로 넘어가고 만다. 미안해 하는 셔먼에게 여자는 늘상 있는 일이라며 괜찮다고 하지만, 셔먼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여자에게 그만 올라가 달라고 부탁한다.


#02 5천만이 시청하는 셔먼씨의 말 할수 없는 비밀

피아노 의자 위에서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뒤,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셔먼은 브루베이커 박사에게 심리 상담을 받고 나서,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망상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여자가 상업광고방송을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여, 5천만이 시청하는 방송에서 셔먼이 자신을 덮치려 했다는 사실을 말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시작한다. 화면을 가득채운 달콤한 키스(Kissing-sweet)와도 같은 눈부신 아름다움. 그러나 그녀가 폭로하는 셔먼의 <피아노 의자 테러>는 메인 주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는 헬렌과 리키에게까지 닿는다.

불안이 극에 달해 휴양지의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셔먼. 그러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베이비시터로, 헬렌은 맥켄지 일행과 함께 헤이라이드를 나갔다고 말해준다. 또한 별 다른 말은 없이 리키의 노를 놓고온 사실을 깨달았다는 메세지만을 전해달라고 했다며 일러 준다. 결국 헬렌이 <피아노 의자 테러>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 셔먼은 비서 모리스 양에게 일상의 즐거움에 대해 떠들어 댄다.


#03 헬렌과 맥킨지의 헤이라이드* 데이트

샤워를 하다 갑자기 헬렌이 맥켄지와 함께 헤이라이딩을 즐기고 있다는 말이 생각난 셔먼. 그의 망상 속에서 둘은 건초더미 위에서 짜릿한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다. 이에 분노한 셔먼은 자기 또한 윗집 여자와 데이트를 해야 한다며 전화번호부를 뒤져 카우프먼씨네 번호로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녀에게 저녁을 함께 먹고 영화도 보자며 데이트를 청한다. 데이트가 끝난 뒤 거리로 나온 그들은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바람을 느끼려고 환풍구 위로 올라선다(여기서 그 유명한 마릴린 먼로의 시그니쳐 포즈인 환풍구씬이 등장한다). 솟구치는 스커트를 황급히 가려보는 여자, 셔먼은 그녀를 바라보며 <바람>의 정당성을 애써 찾아보려 한다. 그러나 망상에서의 바람과 현실에서의 바람은 차이가 무척이나 크다.

* 말이 끄는 건초더미 수레 위에 올라타서 가는 것

 

#04 등 뒤에 다섯발, 배에는 두발

아침을 준비하던 셔먼은 이 무더운 여름, 돈 벌겠다고 뉴욕으로 와 고생하는 그녀를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수 많은 비싼 옷들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런 옷들을 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가 크루훌릭과 함께 자신의 금고를 털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샤워중. 안도감과 함께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다가, 크루훌릭이 자신이 여자와 있었다는 사실을 헬렌에게 알려 헬렌이 아침 열차로 오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셔먼. 망상 속에서 헬렌은 총을 들고 나타나, 가족들이 없는 사이 금발의 어린 아가씨와 놀아난 셔먼을 처참히 응징한다.

그는 상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며 괴로워 하고, 그사이 샤워를 마친 여자는 단지 악몽일 뿐이라고 셔먼을 위로해 준다.


 

영화 초반부, 지금의 맨하탄의 지명의 유래가 된 원주민 맨하탄 부족의 풍습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낚시나 사냥을 하거나 덫을 놓아 잡은 동물을 먹으며 산다. 그러나 무더위가 찾아오는 7월이면, 부녀자와 아이들을 조금 더 시원한 피서지로 보내 혹독한 여름으로부터 도피시킨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배려같지만, 자유의 몸이 된 남자들은 글래머러스한 여자에 이끌려 홀린듯 그녀를 따라 다닌다.


수백년이 지난 현재, 7월 맨하탄의 풍경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해마다 바캉스 시즌이 다가오면 외도를 저지르는 남성의 수가 현저히 높아진다. 아내와 자식들이 피서를 가고, 남편들만 남아 돈을 버는 이 시즌, 외로운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아가씨 한 명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락 콘서트와도 같은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셔먼은 자신은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아가씨에 홀린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윗층 여자가 나타난 순간, 모든 수컷의 본능이 그러하듯 셔먼 또한 위험한 관계에 대한 욕망으 불타오른다. 모든 망상은 이름 모를 금발 미녀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셔먼의 망상은 도덕과 양심이 흔들리는 순간, 불꽃이 터지듯 발현된다.

 


당신의 마릴린 먼로는 무엇인가?

망상이라고 다 정신병은 아니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은 더 나은 상상이나 망상을 촉발시킨다. 건전한 망상은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현재의 압박과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병이 된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상상이나 타인이 자기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생각이 정신적 영역에서 물리적 영역으로 그 위치를 바꾸게 되면 한 순간에 가해자가 돼 버린다. 망상을 즐기기 위해서는 모든 정신적 활동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기존의 가치관을 뒤 흔드는 모험적 열망을 이끌어 내는 『마릴린 먼로

당신은 무엇을 꿈 꿀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


의외로 우리는 억압과 통제에 익숙해져 있다. 건강한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고 세상의 질서에 순응한다. 더러 그 규칙이나 질서라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불완전한 자유>를 추구한다. 조금이라도 덜 버리기 위함이다.


야생에서의 인간은 안전과 생존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켜야만 했다. 악천후, 짐승, 타인 등 여러 위협요소로부터 불안을 느끼며 진화해온 인간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고 나서는 더이상 홀로 세상과 마주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안정감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 권력의 통제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들.


높고 튼튼한 성벽은 자연 재해나 짐승 및 적의 공격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었다. 그대신 권력에 납작 엎드리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개개인의 특성과 개성은 매스 게임처럼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성벽이 허물어진 21세기의 빌딩 숲에서도 여전히 현대인들을 사회적 안전망에 기대어 사는 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사회가 재단한 도덕과 윤리로 학습되어진 인간들은 기성의 틀 바깥으로 나가기를 두려워 하며 반쪽짜리 자유에도 감사해 한다.


영화 <7년만의 외출>에 등장하는 리처드 셔먼이라는 인물 또한 틀에 박힌 삶을 따르는 성실한 사람이다. 실생활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비도덕적이므로, 그러한 욕구를 망상으로 대체하고 자신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책에 쓰여진 도덕과 윤리는 상처받은 개인의 심리까지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다. 아버지, 남편, 직원, 친구로서의 의무는 넘쳐나는 와중에 <나>의 역할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꿋꿋하게 착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견뎌내 온 그 앞에 이름없는 금발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는 정체성 없이 부여된 역할에만 충실한 삼류배우나 다름없었다. 마치 휴양지에 가면서 패들(노)을 빠뜨리고 간 셔먼의 아들 리키처럼 도덕과 충동 사이에서 방황하는 방향성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7년간의 결혼 생활 중 딱 한 번의 외도를 저지르고 만 셔먼은 그제서야 자신의 역할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본능에 충실한 수컷의 역할도 아니고, 사장 대신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는 직원의 역할도 아니었다. 바로 바다 한 가운데에서 표류하고 있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노를 저어야만 하는 뱃사공의 역할, 즉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자신의 것임을 깨달은 셔먼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패들만을 들고 뛰쳐 나간다.


그리고 이름없는 금발 미녀는 그에게 신발을 던져주는데,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나온 것 처럼 신발은 현실을 상징한다. 금발 미녀는 셔먼이 오랜 망상의 고리를 끊고 현실에서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상과 현실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상적인 꿈을 현실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우리 마음속의 <마릴린 먼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머릿속에만 맴도는 관념들이 실재의 상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02화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1 블루 재스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