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며 주변의 모두가 디자이너를 꿈꿀 때에도, 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전공과 꿈을 적절히 섞어 패션 잡지 에디터가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컨셉을 잡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재미있었고, 옷을 만드는 일은 퍽 잘 해냈지만, 디자인은 늘 자신이 없었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교수님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는데, 담당 교수님은 나를 두고 디자인 실력은 그저 그런데 스토리와 말발로 좋은 점수를 받아낸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 피드백이 왠지 싫지 않았다.
브랜드 에디터로 일하면서 디자이너의 직무에 대해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브랜드 에디터는 마지막 단계에서 소비자를 설득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이 옷을 왜 만든 거래요?" 회사 다니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나도 설득되지 못하는 상품을 남에게 설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유려한 수식어를 붙인다 한들, 앙꼬가 빠진 찐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무나 기본적인 질문에 디자이너들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운영팀에서 영업과 마케팅, 매출과 데이터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에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디자이너가 이유 없이 만든 옷으로는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빈 박스를 포장해 봤자 쓰레기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냥 유행이라서, 그냥 대표가 만들라고 해서, 그냥 실장이 시키니까 등등의 이유로 만들어진 수많은 상품들이 뒷단으로 오며 점점 힘을 잃어갔다. 실질적인 매출이 KPI가 되는 팀에 들어오자 회사가 다 이러겠거니 대충 묵인하고 넘어갔던 본질이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조직이란 건 매치나 뒤치나 굴러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디자인이 하고 싶어졌다.
프로세스 중간 어딘가에 끼여 왜를 따져 묻기만 하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학교를 그만뒀을 때는 글이 쓰고 싶어서였다. 가장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둘 때의 이유가 디자인이 하고 싶어서인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디자인은 역시 어렵고, 내 재능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이 없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재미있게 하고 있다. 인생은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일단은 이 과정을 즐겨 봐야겠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디자인 학교를 때려치웠던 나의 선택이 나를 브랜드 에디터의 길로 이끌었듯이, 지금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