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비를 맞고 달리는거야
여덟 살의 여름. 또래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1학년을 시작할 때 이름 석 자 적힌 명찰로 서로 구분하던 아이들이 성격을 입힌다. A는 달리기 빠른 친구, B는 종이접기를 잘하는 친구, C는 줄넘기 쌩쌩이까지 하는 친구. 그 속에서 아이는 어떤 캐릭터로 보일지 고심하는 눈치였다.
아이의 선택은 자전거. 그것도 두 발 자전거. 동네에서 자주 어울리는 동갑내기 아이 중 두 발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보조 바퀴를 뗀 두 발 자전거가 아닌, 처음부터 바퀴가 두 개뿐인 자전거는 형들의 전유물이었다. 중형 두 발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시에 또래와는 다르다는 증표다. 보조 바퀴도 떼지 못한 아이가 두 발 자전거를 타야겠으니 사달라고 말을 꺼낸 이유를 한참 곱씹고야 알았다.
두세 번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더니 금방 두 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온종일 두 발 자전거가 달리는 모양이다. 하필 그 시기가 장마와 겹쳤다. 날씨가 맞아야 탈 수 있는데, 그날도 비가 오락가락했다. “이 정도 비는 그냥 맞고 타도돼!”라면서 가랑비를 맞으며 혼자 바퀴를 굴렸다. ‘저렇게 좋을까?’ 갸웃하다가 ‘그래, 나도 펌프에 미쳤던 때가 있었지’ 하며 가만히 지켜본다.
여기까지였다면 풋풋한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이었을 텐데, 분위기를 전환하는 아이의 말.
“엄마, 엄마랑 자전거 모험하고 싶어!”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하는 값을 구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다. 자전거를 그냥 타는 것도 아니고, 정체는 모르겠지만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 ‘모험’을 ‘나와’ 해야겠다는 거잖아. 문제 풀이를 거부할 이유는 충분했다. ‘엄마 자전거도 없고, 하늘을 봐라. 비가 언제 퍼부을지도 알 수 없지 않니?’ 최선의 답을 찾는 짧은 순간,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간절하다. 떼쓰며 조르지도 않는다. 그만큼 아이는 진지하다. 그 앞에서 내가 떠올린 이유는 궁색하다. 아이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선 집에 돌아와 자전거 타기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고 운동화까지 신고 나섰다. 비 맞으면 축축해질 것을 알지만, 이왕 타기로 했으니 제대로 타보겠다는 의지를 꽉 조여 맸다. 휴대전화 앱을 켜서 가까운 T-바이크를 찾았다. 다행히 아파트 정문 밖 도로에 주차돼 있었다. 내가 안장에 앉자 아이가 외쳤다.
“엄마, 내가 앞장설게. 잘 따라와!”
다시 아파트 정문을 통과해 단지 구석구석을 누볐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아니어서 사람을 피하느라 신경 쓰였는지 아이가 목적지를 바꿨다. 단지 밖으로 나서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달렸다. 달리는 사람은 아이와 나, 둘 뿐. 아무도 없는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내지를 때 나도 모르게 ‘아아아아아아!!!’ 탄성이 터졌다. 앞서 달리던 아이도 그 소리를 듣고 ‘우와아아아!!!’ 소리를 쳤다.
“엄마! 자전거 타면서 바람맞고 소리치니까 진짜 시원해!”
해방감일까. 순간의 감정에 맞는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많이 달렸고, 비를 피할만한 곳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하는 애매한 위치였다. 아이는 계속 달려보자고 했다. 지금 얼마나 재미있을 텐데 당연히 멈추고 싶지 않겠지. 버스 정류장까지 내달리는 2~3분 사이에 빗줄기가 굵어졌다. 핸들을 잡은 손등 위로 빗줄기가 탁탁 꽂히며 따갑기까지 했다. 다행히 금방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나를 향해 돌아선 아이가 웃는다.
“엄마,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같은데? 너무 웃겨!”
내 눈에 보이는 아이 꼴도 마찬가지. ‘어유, 비 맞고 감기 들면 어떻게 해! 이래서 비 올 것 같은 날에는 자전거 타는 게 아닌데’ 마음의 소리는 꼴깍 삼키고, 내 티셔츠 안에 손을 넣어 죽 늘여 아이 머리를 털어주었다.
“너도 물에 빠진 생쥐야. 웃겨.”
자전거 바퀴를 굴리지 않는 데다 비까지 내려 공기가 차가우니 몸의 열이 금방 식었다. 갑자기 춥다는 아이와 마주 보고 끌어안았다. 집으로 돌아가게 비가 빨리 그쳤으면 하는 마음과 이대로 체온을 좀 더 나눠도 좋겠다는 생각이 오갔다. 곧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해가 났다.
“엄마, 지금이야. 출발해.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모험이야.”
자전거 스탠드를 발로 탁, 차고 안장에 오르는 아이의 몸짓이 가볍다. 돌아가는 길은 살짝 오르막이다. 아이는 바퀴가 가볍고 빨리 굴러갈 수 있게 기어를 바꿨다. 자전거가 멈추지 않게 낑낑대고 있는데 아이가 요령을 알려준다.
“엄마, 계속 페달 밟고 있으면 바람이 나를 밀어줘.”
집까지 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또 비가 쏟아지면 어쩌나 온통 신경이 걱정으로 뻗쳐서 등 뒤로 바람이 부는지도 몰랐다. 비가 그치고 부는 바람은 열기 하나 없이 청량했다. 달리다 보면 집에는 도착할 거고, 비가 또 쏟아지면 달리든 끌고 가든 속도를 높이면 되겠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민은 내려두고 자전거 타는 일에 집중하니 가볍게 쭉쭉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껏 유쾌했던 유년으로.
비는 더 내리지 않았다. 해가 나니 아이가 자전거를 더 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모험의 끝을 알렸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씻으니 사라락 몸이 녹아내린다. 아이의 젖은 머리카락을 드라이기 바람으로 말려주는데, 와락 나에게 안긴다.
“나 엄마 너무 좋아!”
무엇을 해주기보다 함께 즐길 때, 아이는 충만해지는 것일까. 유쾌하고 엉뚱했던 어린 나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 내가 더 고맙다. 물론 감기에 걸리지 않고 마무리했으니 더 아름다운 이야기이고.